털과 헤어질 결심
매일 아침 두 번 샤워를 한다. 수영장에 들어가기 전에 한 번. 수영강습을 받고 나와 또 한 번. 첫 번째 샤워는 식칼을 들고 따라오는 살인마에게 쫓기듯 씻고 들어가느라 정신이 없지만, 두 번째 샤워는 오수완(오늘 수영 완료)의 뿌듯함으로 차오르는 마음과 따뜻한 물줄기를 만끽하는 편이다.
쏴,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 뒤통수를 샤워기 헤드 방향으로 하고 샴푸로 거품을 잔뜩 낸 머리를 헹굴 땐 눈을 감기도 한다. 눈을 뜨고 있으면 샤워하는 사람들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내가 다니는 수영장 샤워실에는 칸막이가 없다.
하루는 눈을 감고 머리를 감다가 스르르 눈을 떴더니, 맞은편에 서서 팔을 쭉 뻗고 샤워하는 여자 사람의 겨드랑이가 보였다.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겨털이 수북했다. 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눈을 끔뻑거리며 한참을 쳐다본 것도 같다. 미안해요. 굳이 변명 아니 해명하자면, 수영장 샤워실에서 타인의 겨드랑이 털을 직접 본 게 처음이었다.
부끄러웠다. 소스라치게 놀란 내가 촌스러워 부끄러웠다.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의 딸, 엘라 엠호프의 겨털을 보고 멋지다고 생각했던 사람 아니었나? 브라질리언 왁싱 같은 인위적인 제모를 거부하며 털에 연연하지 않는 밀레니얼세대가 부럽다고 생각했던 사람 아니었어? 미국에서 시작된 바디 포지티브 찬성파가 이렇게까지 당황할 일이야? 그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샤워를 제대로 마무리했는지도 모르겠다.
바디 포지티브는 '내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자'는 메시지를 담은 운동으로 우리말로는 '자기 몸 긍정주의'라 불린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마른 몸을 선호하는 흐름과, 외모로 인한 차별에 반대하며 "마르지 않아도 괜찮아", "가슴이 작아도 괜찮아.", "털이 많아도 돼."라고 외친다. 바람직한 외침이다.
참으로 바람직스럽다고 생각한다. 비만 혐오 사회 살아가는 피하지방 부자로서 마르지 않아도 괜찮아 라는 말에 위안을 느끼며 내 몸을 긍정하려고 한다. 하지만 내 털은 누가 볼까 두렵다. 차마 내 털을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너무 오랫동안 제모하는 여성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일까? 아기 때부터 머리숱이 많고 털이 많았던 털북숭이라서 그럴까? 여전히 내 눈에는 원래 털이라곤 없었던 것처럼 매끈한 겨드랑이가 더 예뻐 보인다.
3년 전 수영 강습을 등록한 날, 나는 털과 헤어질 결심을 했다. 정해진 이별이라고 생각했다. 제모를 하지 않고 수영장에 털털하게 들어갈 생각은 못했다. 미국에 사는 MZ셀럽의 털은 자연스러워 보여도, 서울에 사는 40대 수린이의 털은 주책스러워 보일 것 같았다. 털 한가닥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쭉 겨드랑이와 와이존 제모를 꼭 해야 할 일인 양 성실하고 꼼꼼하게 수행하고 있다. 이왕 제모하는 김에 다리털도 밀고, 팔 털도 민다. 수영 선수도 아니면서 이렇게 제모를 하면 물에 저항을 덜 받을 거라 나 자신을 위로하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머리털 한 올이라도 빠질까 봐 수영장에 수모를 짱짱하게 쓰고 입장하는데, 남녀 불문하고 겨드랑이털을 밀지 않고 입장하는 것은 괜찮은 걸까? 겨털보다 긴 다리털을 가진 사람이라면? 고백하자면, 남편에게 다리털을 밀고 수영 강습을 받으라고 강요한 적이 있다. 누구도 타인의 털을 뭐라고 할 권리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남편의 다리털을 긍정하지 못했다. 미안해 여보.
할머니가 될 때까지 수영을 하다 보면 내 털에도 남의 털에도 무심해질까? 그것이 알고 싶어서라도 수영하는 할머니가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