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낸다는 느낌이 뭔지 떠올릴 수 있는 방법 중 하나
연말이면 각종 사업을 마무리한다고 바쁘고, 그것이 끝나면 비교적 널널~한 업무 환경이 된다.
물론 그것이 잘 끝나야만 여유 있는 연말을 즐길 수 있고, 연말 휴가도 당당하게 올릴 수 있다.
나의 올해 업무는 비교적 빠른 시기에 끝났다. 11월 초쯤 끝났으니, 연말까지는 한 달도 넘게 "끝내야 한다"는 일이 딱히 없는 것이다. 이게 제일 어려운 일이다. 가만히 아무것도 안 하고 있기에는 눈치 보이고, 그렇다고 정해진 기한이 없으니 무얼 하기는 또 싫은 바로 그 상태. 무언가를 하려고 해도 집중력이 흐려진다.
그렇게 친구들과 시시콜콜한 메신저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하루 이틀, 이것이 매일 반복되면 지루해진다. 딱히 할 말도 없고.
그러다 보니 '성취감'을 잃어버렸다. 물론 회사 일 말고 다른 것으로 성취감을 느낄 수 있지만, 사람이 하루 중 가장 많이 있는 곳이 회사 아닌가. 회사에서 무언갈 하지 않고 시간만 보내다 보면 월급을 받아도 찜찜. 그리고 나의 존재를 계속 의심하게 된다. '나는 여기에서 역할이 무엇인가' 시간이 많으니까 쓸데없는 생각도 많아진다. 그러다가 자존감까지 내려가버리는 것도 부지기수.
이렇게 하루하루 보내다간 내 자존감이 바닥나고 우울함만 느낄 것 같아서 뭐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컴퓨터 모니터 아래에 놓인 핸드크림이 손에 들어왔다. 비교적 손의 건조함을 느끼지 않았던(최근에는 달라졌지만 과거에는 그랬었다.) 나는 핸드크림을 잘 바르지 않아서 분명 사용기한도 지났을 핸드크림이 있었다.
곧 다 쓸 수 있을 것 같은 이 핸드크림. 애매하게 찌그러진 모습을 보니 이거라도 다 써야겠다 싶었다.
회사에서 핸드크림 다 쓰는 것을 동기부여 삼아 출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나에게는 이렇게 해서라도 무언가를 끝낼 수 있다는 확인을 스스로 해야 했다.
핸드크림을 다 쓰고 버리는 것도 분명 '무언가를 끝낸 일'이긴 하지 않나.
화장품을 쓰다가도 은색 바닥이 드러날 것 같을 때면 그 은색바닥을 보기 위해 그 화장품만 매일 써서 결국 팬이 보이게 구멍을 만들어내는 일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힛팬. 이게 은근 쾌감이 쏠쏠하다.
그런 심리로 핸드크림을 열심히 써봤다. 손 씻을 때마다 사용해 보고, 곧 다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괜히 건조하지 않아도 발라보고. 그러다가 머리 만져서 머리도 떡져보고.
분명 다 쓴 것 같은데 짜도 짜도 계속 조금씩 나오는 이 상황은 나를 약 올리는 것 같다.
그렇다고 아직 남아있는 걸 그냥 버릴 성격은 아닌 탓에 꾸역꾸역 핸드크림을 짜낸다.
그러다 보니 지난 화요일,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어도 나오지 않는 핸드크림은 만나게 됐다.
다 써갈 즈음에는 얼른 다 쓰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는데, 다 쓰고 나니 생각보다 성취감이 크지는 않았다.
그런 게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하나 끝냈다. 꾸준히 무언갈 하다 보면 결국 끝이 난다.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핸드크림을 사용하면서 또다시 느꼈다.
그렇다고 내가 느끼던 무기력이 사라지진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소소한 무언갈 해볼 용기가 생겼다.
모니터와 선반에 하얗게 보이는 먼지를 닦고, 핸드크림 기름으로 얼룩져 있던 키보드 커버를 깨끗하게 씻었다.
이제 좀 일 할 맛이 나기 시작하네?
(하지만 그 열정은 오래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