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혈로 찾아낸 추억
난 2008년부터 헌혈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 학교로 온 헌혈버스를 보고 우리도 헌혈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헌혈을 하면 수업을 빠질 수 있다는 점은 학생들을 헌혈차로 이끌기에 매우 매력적이었다. 나 역시 친구들과 이 새로운 경험을 놓칠 수 없다며 운동장에 있는 버스 앞에 줄을 섰다. 여자 친구들이 하나씩 들어갔다가 그냥 나온다.
"나는 못한데..."
몸무게가 안 되는 친구, 철분이 부족한 친구,, 줄줄이 헌혈에(수업 땡땡이에) 성공하지 못하고 나오는 친구들을 보며 나도 점점 떨려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 차례!
신분증과 손을 내밀고 간호사 선생님께서 내 네 번째 손가락을 쥐고 말하셨다.
"따끔해요~"
파란 황산동 용액으로 내 피를 한 방울 떨어뜨리곤 "학생은 되겠다!"라고 하셨다.
(물론 그때는 그게 황산동 용액인지 몰랐다. 15년이 지난 지금 내 머릿속에 추가되어 있는 지식..)
오! 나는 된다니! 뭔가 떨리기도 하고 수업 안 들어가도 된다는 즐거움에 버스 창 밖의 친구들에게 동그라미 사인을 표시했다. 물을 한잔 마시고, 준비된 자리에 누웠다. 두근두근.
"바늘 들어갈 때 살짝 따끔해요~"
두 번째 따끔 예고다. 처음에 참을만했기 때문에 겁 없이 들어가는 바늘을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아...? 이 바늘은 지금까지 내가 주사 맞을 때 봤던 바늘이 아니다.
샤프보다 두껍고 볼펜보다도 두꺼워 보이는 저 바늘이 내 몸으로 들어간다고...?
눈을 질끈 감으니 바늘이 들어갔고 빨간 내 피가 바깥으로 나오고 있었다.
들어갈 때 따끔한 느낌이 나긴 했지만 참을만했다.
약 10분 뒤, 삐-삐-하는 소리가 울리고 나의 첫 헌혈은 끝이 났다.
'어? 생각보다 괜찮은데?'
헌혈팩을 보는데, 내 피 양이 생각보다 많았지만 어지럽거나 다른 느낌은 없었다. 뭔가 내 피가 누군가에게 소중하게 쓰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뜻깊었다.
게다가 손에 쥐어진 헌혈증서와 문화상품권은 덤이다.
그리고 이 날, 헌혈에 성공했던 친구들 중 몇몇이 어지럽다고 엎드려있다가 야자를 안 하고 집으로 갔다.
나는 어지럽지는 않았지만 덩달아 야간 자율학습을 빠질 수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헌혈 횟수는 39회가 되었다. 대학교 때에는 친구들을 기다려야 할 때, 시외버스를 기다려야 하는데 시간이 많이 남았을 때 헌혈의 집으로 갔다. 돈도 쓰지 않고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었다. 동시에 봉사시간도 4시간이나 받을 수 있다.
어느 해에는 새해 계획 중 하나로 '헌혈 3회 이상 하기'를 적었던 적도 있었다.
헌혈을 일정 횟수 하고 나면 헌혈 유공장도 주는데 30회를 하면 은장을 받게 된다. 나도 2015년에 수령했다.
직장인이 되고 나니 헌혈하는 게 쉽지 않았다.
회사에 헌혈차가 왔을 때, 코로나 시기 때 지정헌혈이 필요한 직장동료를 위해 이렇게 틈틈이 해왔다.
다행히 오랜만에 헌혈의 집을 찾을 때마다 건강상태 등으로 헌혈이 되지 않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가 헌혈을 하고 나면 헌혈할 수 있는 몸을 가지고 있는 것에 자부심을 갖게 되고 또 누군가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도 느낄 수 있었다.
2022년에는 헌혈을 못했고, 2023년에 한 번, 2024년이 된 기념으로 다시 헌혈의 집을 찾았다.
오랜만에 갔기 때문에 혹시나 철분이 모자랄까 혹은 하고 나서 어지럽지는 않을까 걱정을 했다.
철분 수치를 재고 선생님께서는 "철분이 너무 좋아요. 잘 드시나 봐^^ 호호"하셨다.
'맞아요. 저 잘 먹어요.'
그리고 헌혈이 끝난 뒤에도 아프지 않고 멀쩡했다.
초코파이를 먹으면서 '그래. 잘 먹어서 철분도 좋은 내가 헌혈해야지! 누가 하겠어~'라는 생각을 했다.
헌혈하면 이렇게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데 이 느낌을 몇 년간 잊고 살고 있었다니!
올해는 시간을 내서 헌혈의 집에 자주 가야겠다. 자주여도 1년에 최대 5회지만.
사실 무기력함 때문에 신선함을 찾으려고 오랜만에 헌혈의 집을 찾은 것이었지만 헌혈의 집에 가니까 옛날부터 내가 헌혈에 참여했던 이유, 참여하게 된 계기 그리고 나의 학창 시절, 대학생 시절 추억이 떠올라서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아 나 이런 거 좋아했었지.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고 있었네?'
앞으로도 내 몸이 허락하는 한 꾸준히 헌혈을 할 것이다.
무기력하다고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뭐라도 하기 시작하니 이 시간을 통해 내가 잊고 지냈던 좋아하는 것,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내가 즐거워하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무기력 탈출은 된 것 같으니 내가 다시 찾게 된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글을 이어나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