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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리와샐리 Jan 26. 2024

아침에는 사과를 깎아보자.

우리 집 냉장고에는 사과 10개가 있다.

그냥 사과가 아니고 우리 집 냉장고에 들어간 지 세 달이 된 사과다.

이것저것 다 챙겨주시고 싶은 친정엄마가 준 쇼핑백 안에는 사과가 한아름 들어있었다.

사과를 냉장고에 넣으면서 '아침으로 먹으면 되겠다!'라고 생각했다.

아침을 뭐라도 항상 챙겨 먹던 나였기에 사과를 금방 먹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오산이었다.

어릴 때부터 엄마가 예쁘게 내어준 사과는 많이 먹었었는데, 이제 사과를 먹으려면 사과 까는 일은 내 몫이다.

냉장고에 넣을 때는 사과 까먹는 일이 번거로울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아침에 사과 까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빵, 베이글, 데워먹는 수프, 그릭요거트 등등의 간편한 아침식사 거리로 사과는 뒷전이 되었다.

그렇다고 저녁에 먹자니 어릴 때부터 "사과는 저녁에 먹으면 독 이래~"라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던지라 '그래... 그냥 내일 아침에 먹자'며 냉장고를 닫았다. 

그렇게 사과는 냉장고 야채칸에서 세 달이 넘게 방치됐다.


어느 날, 냉장고에서 사과도 늙고 있는지 쭈굴쭈굴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이대론 안 되겠다 싶었다.

(그전에 먹었으면 되는데 나는 꼭 '이대론 안 되겠다' 싶을 때가 되어야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소중한 사과를 챙겨준 엄마에게 나의 이런 모습을 보이기도 싫었다.

(물론 들키는 일이 있지는 않겠지만 스스로 양심의 가책이랄까..)

그래!!!!!!

결심했어!!!!!!!!!!!!!!!

남편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내일부턴 아침에 무조건 사과다!!!!!!!!!!!!!!!!!!!!!!!!!!!!!!!!!!!!!!!!!!!!!!!!!!!!!!!!!!!!!!!!!!!

그렇게 다음날 아침, 패기 넘쳤던 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누워서 출근준비를 하는 남편에게 나는 절대 일어날 생각이 없는 채로

"아.... 사과 깎아줘야 되는데......."라고 형식적으로 말했다.

애초부터 일어날 생각이 없었으므로 "아침으로 사과 먹기" 프로젝트의 첫날은 실패로 돌아갔다.

냉장고를 열어는 봤다. 주름진 사과가 보인다.

안된다. 사과가 어제보다 더 쪼글쪼글 해진 것만 같다.


내일은 무조건 사과를 깎고 말 테다.

더 큰 다짐이 필요하다. 사과를 아침에 먹어야 할 이유를 더 찾아본다.

대학 시절, '화장품학'이라는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유명 화장품 브랜드에서 일하시는 분이 객원 교수님으로 오셔서 수업하는 과목이었다.

남자분이신데도 팽팽하고 반짝거리는 피부를 자랑하셨다.

한창 피부에 관심이 많을 대학생들은 피부 비결에 대해 질문을 많이 했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그때, 교수님의 답변은 "화장품이고 뭐고 아침에 사과 반쪽 먹는 게 피부에 엄청 좋다"라고 하셨던 말씀을 떠올려본다.

(사과 반쪽과 함께 말씀해 주셨던 뷰티 팁은 스팀타월과 대중교통 한 정거장 미리 내려서 조금이라도 꾸준히 걷기였다. 수업시간에 배운 전공 내용은 기억 안 나지만 이런 인생 꿀팁은 10년이 지나도 절대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 단순히 냉장고에 있는 사과를 없애려고 먹는 게 아니야.

내 피부를 위해서. 엄마를 위해서. 그리고 건강을 위해서. 그리고 나와의 약속을 위해서.

내일 아침 스스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온갖 수식어는 다 갖다 붙여 다짐한다.


다음날 아침에도 역시 침대에서 벗어나려니 침대가 나를 애타게 붙잡는 엄청난 방해가 있었지만, 

어제 온갖 다짐을 다 했는데 안 일어날 수가 있으랴.

일어났다.

냉장고를 열었다.

사과를 꺼낸다.

쪼글쪼글 사과가 겉으로 주름만 진 줄 알았는데 직접 만져보니 처음의 단단함이 사라졌다.

생각한다.

'이거 먹어도 될까.....?'

그래도 이왕 일어났으니 칼을 들어본다.

주름진 부분을 없애기 위해 조금 두껍게 껍질을 벗겨낸다.

그래도 아직 안의 부분은 단단하다.

'휴~ 다행!!!!!!'

예쁘게 사과를 깎아 접시에 놓는다.

드디어 해냈다. 아침으로 사과 깎아 먹기.

접시에 놓인 사과가 이렇게 뿌듯할 일인가.

정말 시간도 오래 걸리는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


곧 해야지, 해야지, 다짐하고서는 시작하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화장실에 다 쓴 클렌징용품 빈 병 치우기, 

보고 싶다고 기록해 둔 영화 보기, 화장 용품 세척하기,

대학원을 위한 영어 공부, 빌려 놓은 읽기, 교육 다녀온 기록 남겨두기 등등

막상 시작하면 또 별거 아닌 것처럼 금방 끝날 일도 미루고 있는 나란 사람.

'그래도 난 아침에 사과도 깎아먹는 사람이야~ㅎㅎㅎㅎ 이 정도면 그래도 잘 살고 있는 거 아닌가?'

라고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처럼 치켜세워본다.



이제 사과 5개가 남았으니 다음 주도 역시 모닝사과다!

쪼글쪼글 주름졌지만 맛 좋은 사과. 다른 사과를 먹어보니 우리 집 사과가 이렇게 맛있는 사과였는데 내가 방치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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