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친정에 가지 않아도 된다. 엄마 아빠가 안 계신 친정엔 동생 내외만 남았다. 같은 공간이지만 낯설게 느껴진다.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하나 시작할 차례다. 퇴직 이후 2년여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하지 않았나.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육체적으로 힘든 날들이 지나가니 마음이 힘든 날들이 찾아왔다. 책을 읽어도 영화를 봐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멍할 뿐이다.
무기력한 날들이 느릿느릿 흘러간다.
'엄마는 요양원에서 잘 지내실까? 엄마도 나처럼 헤매고 계시겠지….'
아파트 산책길을 걸으면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곤 했는데, 엄마에 대한 기억은 요리로 연결되나 보다. 갑자기 엄마가 해준 감자조림이 생각났다.
엄마는 감자조림을 참 잘 만드셨다. 기름이 많지 않은데 윤기가 흐르고, ‘단짠’이 환상적인 감자조림.
엄마가 만든 그 맛이 그리워 감자를 깎는다. 예전에 엄마가 가르쳐 준대로, 깍둑썰기를 한 감자를 기름에 볶다가 달큼한 간장(간장에 설탕을 조금 넣어 미리 섞어 둔다)을 붓고 뚜껑을 덮은 뒤 약한 불에 뜸 들이듯 졸인다. 그런데 그 맛이 나지 않는다. 엄마가 만든 감자는 식감도 좋은데, 이건 좀 푸석하다. 감자 탓인가….
어릴 적 난 감자요리를 참 좋아했다. 초등학교 1학년 무렵이었을까. 엄마랑 모처럼 시장에 같이 갔는데, 엄마가 여기저기서 감자 값만 물어보곤 안 사는 거다. 아마도 햇감자가 막 나올 때라 비쌌던 모양이다. 아무튼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내가 골을 부렸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기억에 남을 일도 아닌데, 지금도 엄마랑 누볐던 그날 시장 풍경이 눈에 선하다.
엄마는 맏딸인 내게 집안일을 거의 시키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온갖 집안일을 해야 했던 당신의 고생을 딸에게만큼은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엄마가 일본에 언제 가셨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곳에서 태어났다고 하신 것도 같고…. 아무튼 외할아버지가 히로시마 원폭으로 돌아가시자 엄마는 외할머니, 외삼촌과 함께 낯선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엄마 나이 겨우 아홉 살, 외삼촌은 일곱 살이었다. 외할아버지가 힘들게 번 돈으로 호위 호식하던 할아버지 형제들은 빈털터리로 돌아온 엄마 가족을 홀대했다. 나중에 대학 공부까지 시키겠다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엄마의 삶도 송두리째 무너졌다.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시절을 엄마는 고스란히 목격하고 감당해야 했다.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진 당신의 삶을 견디며 엄마는 수천 번의 다짐을 했을 것이다. 당신 자식들에게는 새로운 세상을 물려주겠노라고.
엄마의 ‘한’과 기대, 여자라고 차별하지 않는다는 당신의 신념은 오롯이 내게 투영됐다. 엄마는 최선을 다해 뒷바라지해주셨고, 나는 그 수고로움을 먹고 편히 공부했다.
그다음엔 내가 돌려드릴 차례인데 나는 그야말로 ‘먹튀’한 딸이다. 늘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는 일만 했고, 결혼해선 같은 수도권에 사는가 싶더니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리곤 자기 살기 바쁘다고 엄마를 잘 챙기지 못했다.
친정에 갈 때면 늘 이것저것 해 먹이려 애쓰던 엄마. 언젠가부터 엄마 요리가 맛이 없어졌고, 깔끔하던 살림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끼긴 했다.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나는 그저 노화려니 방심했고, 치매는 소리 없이 엄마를 잠식해 들어갔다.
뒤늦은 후회와 탄식을 해보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임을 안다. 그나마 엄마가 ‘초울트라 긍정’ 코드를 갖고 계시기에 ‘예쁜 치매’에 머무신 걸 다행이라 생각한다.
이제 엄마 모습은 요양원에서 보내주는 사진들로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다. 얄궂게도 코로나 상황이 심각해져 당분간 면회가 어렵다고 한다.
모쪼록 요양원에서도 그렇게 명랑하시길, 아프지 않으시길, 마음이 평안하시길 오늘도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