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우리 딸이네!”
지난번 면회 때 요양원 대표와 이야기를 나눈 게 효과가 있었나 보다. 과도한 약제비가 사라졌다. 엄마도 정상 컨디션으로 회복됐다. 다행이다.
면회가 안될 때 엄마와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영상통화뿐이다. 엄마도 기다리셨나 보다.
“아이고 고마워라.”
요양원 대표가 따님 바꿔드리겠다고 하니 엄마가 연신 고맙다고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가 밝은 얼굴로 내게 아는 척을 하신다. 이때 “내가 누군데 보고 싶어?”라고 물으면 안 된다. 엄마가 당황해하실 게 뻔하니 말이다.
엄마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은 “식구잖아.”이다. 맞다, 식구. 자식도, 며느리도, 사위도 모두 식구라고 하셨지.
안부를 묻는 짧은 대화가 끝나자 대표가 “사랑한다고 하세요~”라고 거든다. 엄마는 시키는 대로 “사랑한다!”라고 말하고 쑥스러워하신다. “나도 엄마 사랑해!”라고 답하니 엄마가 손뼉을 치며 좋아하신다. 오십여 년을 “사랑한다”, “사랑해요, 엄마”라고 말한 적 없던 모녀가 핸드폰 화면을 보면서 사랑을 고백한다. 치매를 앓는 엄마도 사랑한다는 말에 저리 좋아하시는데 우리는 왜 그렇게 감정 표현에 인색했을까.
대표가 전하길, 엄마가 얼마 전에 ‘나도 아들딸이 있다’고 하셨단다. 그야말로 빅뉴스다. 요양원에 함께 계시는 어르신들이 자식들 얘기를 하니까 당신도 아들딸이 있다고 말씀하셨는지는 몰라도 기뻤다. 좋아질 리 없는 치매도 컨디션에 따라 깜빡 정신이 돌아오기도 하는 걸까.
엄마에게 따로 간식을 보내드리면 요양원에선 엄마의 영상 메시지로 화답했다.
“어르신~ 따님한테 잘 받았다, 고맙다고 하세요.” 그러면, 엄마는 시키는 대로 “딸아, 고맙다.” 하시곤 “시집도 안 갔는데 딸 아들이 어딨어?” 그러셔서 요양원 사람들을 한바탕 웃게 했다.
어느 땐 엉뚱하게 “고맙다 동생아, 잘 먹을게.”라고 하시기도 했다. 그 동생이 당신과 비슷한 나이대의 ‘늙어버린 딸’을 말하는 건지, 이미 세상을 떠난 ‘그 동생’을 말하는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일관되게 엄마는 오십 대이고 결혼하지 않았다고 하셨다. 그런데 딸이 있다고 하셨다니 정말 엄마의 기억이 조금이라도 살아난 걸까.
요양원에서는 매주 엄마의 활동사진을 카톡으로 보내 준다. 유치원에 간 아이가 무슨 활동을 하고 친구들과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하는 학부모에게 선생님이 보내주는 주간 통신 같은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요양원에선 어르신들에게 “여기 보세요~” 같은 요구를 하지 않는다는 것, 굳이 꾸미지 않는다는 점인 것 같다. 처음엔 ‘맞아, 이렇게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더 좋지!’ 그랬는데, 매주 사그라드는 듯한 엄마 모습을 보는 건 가슴 아픈 일이다.
자주 누워계셔서인지 납작하게 눌려 있는 머리카락이야 그렇다 쳐도, 색연필 쥔 손이 지난번보다 힘이 없어 보인다거나 찡그린 표정이 보일라치면 엄마 사진에 일희일비하는 자식들은 걱정이 앞선다.
그날도 그랬다. 아리셉트 용량을 줄인 다음부터 활기가 좀 생겼다고 들었는데 사진 속 엄마 표정이 어두워 보였다. 별일 없으신지 걱정하는 카톡을 보냈더니 요양원 대표한테 바로 전화가 왔다. 무슨 일 있으면 요양원에서 연락한다고, 별일 없이 잘 지내신다고 한다. 통화가 된 김에 엄마랑 짧게 영상통화를 했다.
“어, 우리 딸이네.”
엄마가 나를 알아봤다. 그것도 단박에. 가수 장미화는 알아봐도 딸은 동생 아니면 그냥 식구라고 하시던 엄마가 내게 딸이란다.
가수 장미화가 소환된 얘기의 전말은 이렇다. 작년에 부모님이 우리집에 40여 일 머물고 계실 때였다.
너무 오랜만에 딸네 집에 오신 엄마는 좋아하시면서도 낯선 환경에 힘들어하셨다. 아침마다 당신 물건을 죄다 챙겨 가방에 쑤셔 담고는(당신 물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아셨다. 심지어 빨래 건조대에 걸린 당신 옷도 쏙쏙 빼서 담으셨다) 집에 가신다고 했고, 아이처럼 언제 집에 가느냐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아버지를 졸랐다.
그러던 어느 날, 텔레비전 모 프로그램에 가수 장미화가 나온 모양이다. 가만히 화면을 보시던 엄마가 “장미화네!”라고 반응하신 것이다.
바로 며칠 전, 식사 준비를 하는 나를 찬찬히 보시길래 “엄마, 왜?” 그랬더니 “많이 보던 사람이라….”라고 말씀하셔서 가슴이 쿵 내려앉았었는데. 세상에 가수 장미화를 알아보시다니!
대체 엄마의 기억력은 어떻게 얽힌 것일까? 장미화 특유의 “안녕하세요~?”라는 목소리가 엄마의 잠재된 의식을 자극한 것일까? 심란한 생각을 하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가수 장미화에게도 진 딸이라니…. 의문의 1패네.’
아무튼 그랬던 엄마가 전화기 속 나를 보시더니 딸이란다. 엄마의 기억력이 게임 아이템처럼 정말 +1만큼 진화한 것일까? 이렇게 서서히 좋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님 다른 어르신들이 아들딸 얘기를 달고 사니까 엄마도 한번 ‘딸’이라고 찍어본 걸까?
기분 좋게 반응하고 넘기면 될 것을, 나는 또 쓸데없이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엄마가 언제 오냐고 물으시길래 면회가 풀리면 가겠다고 했다. 이른 저녁을 드시는지 엄마는 뭔가를 계속 씹고 계셨다.
요양원 대표 말이, 요즘엔 당신이 숟가락을 들기 싫어하셔서 먹여 드리기도 한단다. 아, 이건 퇴행인데…. 치매는 정말 종잡을 수가 없다.
엄마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엄마가 직접 드셔야 한다고, 밥 잘 드셔야 한다고, 마치 아이를 달래듯 얘기하고 끊었다.
엄마는 좀 전에 통화한 딸을 곧 잊어버리겠지만, 다음에 만날 때 뭘 가져가야 좋아하실까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집에 계실 때 읽어 드리면 재미있어하셨던 책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를 챙겨야겠다.
부디 엄마와 다시 면회하는 날에도 딸들을 알아보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