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내게 온몸으로 말을 걸어왔다.
먼저 체린씨를 소개해야겠다. 체린씨로 말할 것 같으면 카도씨와 함께 우리 집에서 나고 자란, 태생부터 특별한 반려식물 되시겠다.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체린씨는 먹고 남은 체리 씨앗에서 태어났다. 한동안 아보카도 씨앗을 발아해 키우는 게 유행이었다. 물론 나도 그 유행에 동참했고 그렇게 태어난 카도씨가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보니 어떤 씨도 그냥 함부로 버리기 미안해졌다. 아니, 아까웠다. 혹시 알아? 이러다 정말 카도씨가 튼실한 아보카도를 떡하니 내놓을지. 카도씨의 왕성한 성장 속도로 미루어 봤을 때 아주 불가능한 얘기도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맛있는 체리는 어떨까? 순전히 호기심에서 시작된 일이었지만, 나름 진지했다. 일단 공구함에서 니퍼를 꺼내 체리 씨앗의 딱딱한 껍질부터 깨부쉈다. 그 안에 곤히 잠들어 있던 진짜 씨앗이 깰세라 조심조심 화분으로 옮기고 흙 이불을 토닥토닥 덮어줬다. 며칠 뒤 새싹이 기지개를 켜며 깨어나는가 싶더니 체린씨는 폭충성장을 했다. 자연의 신비란 참...!
그런 체린씨가 어느 날 내게 온몸으로 말을 걸어왔다.
며칠 관심 좀 안 줬다고 그새 잎사귀를 축 늘어트리고 있는 체린씨를 발견했다. 놀아주지 않는다고 두 귀를 축 늘어트린 풀 죽은 강아지처럼 체린씨는 축 늘어져있었다. 아차 싶었던 나는 부랴부랴 조리개 가득 물을 담아와 물을 흠뻑 주었다. 햇볕을 골고루 받지 못해서 한쪽으로 기우는가 싶어서 화분도 돌려주었다. 겨우내 창문을 덜 열었더니 통풍에 문제가 있었나 싶어 창문을 열고 바람도 쐬어주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 이제 체린씨 스스로 기운을 차리길 기다릴 수밖에..
“힘을 내요, 체린씨!”
잠시 후 다른 일을 보다가 돌아보니 언제 그랬냐는 듯 체린씨가 잎사귀를 쫑긋 세우고 쨍하게 웃고 있었다. 쫑긋 세운 두 귀를 펄럭이며 신이 나서 뛰어다니는 강아지처럼 생기가 넘쳐흘렀다. 체린씨는 참 단순도 하지. 솔직하다 못해 투명한 체린씨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샜다. 나의 관심과 손길 하나하나에 이토록 솔직하게 온몸으로 반응을 해주다니, 고맙기도 하고 살짝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신기했다. 관심 좀 줬다고 이렇게 확 달라지나? 그때 축 처진 내 마음이 보였다.
살다 보면 딱히 어떤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축 처질 때가 있다. 만사가 귀찮고 심드렁해지는 순간. 누가 뭐라는 것도 아닌데 괜히 움츠러들고 나 자신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순간. 작은 먼지가 되어 공기 중에 흩어질 것만 같은 기분. 그럴 때면 으레 마음을 탓하곤 했다.
‘늘 그놈의 마음이 문제지!’
내 마음이 어때서? 왜 나는 체린씨에게는 관심을 기울이면서 정작 내 마음은 모른 척 방치했을까? 내 마음에게 미안해진 나는 축 처진 내 마음에도 물을 흠뻑 주고, 햇볕을 쬐어주고, 바람을 쐬어주기로 했다. 나의 하찮은 로망 리스트에서 하나 골라 움직였다. 햇살 아래에서 책 읽기.
어렵지 않고 말랑말랑한 사랑이야기를 골라 근처 공원으로 나가 햇살이 잘 드는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책장에 반짝이는 햇빛과 일렁이는 그림자가 자꾸 장난을 걸어왔다. 햇볕을 쬐다 보니 내 마음도 그새 쫑긋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 깊숙이 가라앉아있던 활기가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음이란 참 단순도 하지! 그새 헤헤거리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