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나쁘기만 한 일은 없다
코로나가 한참이던 때의 일이다. 8월 첫째 주에 여름휴가를 계획하고 있었다. 한 열흘 정도 강원도 삼척을 거쳐 포항, 부산을 다녀올 예정이었다. 그런데 전국적으로 거리두기 단계가 상향되면서 여행 계획이 전면 보류했다. 잔뜩 기대하고 있던 아이들, 특히 당시 중1이었던 첫째의 실망이 컸다.
외출도 삼가고 집에만 있자니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서로 별일 아닌 일에 짜증을 내고 화를 냈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 첫째가 말했다.
“우린 지금 여행이 필요해요. 여행 가서 스트레스를 좀 풀고 와야 한다고요!”
스트레스가 쌓이면 여행을 떠나야 하는 남편의 오랜 습관에서 비롯된 우리 가족의 여행 사용법이다. 우리는 주기적으로 여행을 다니며 스트레스를 조절한다. 여행지에서는 가족 간의 정이 더 돈독해지는 마법이 일어난다. 우리는 그걸 여행 매직이라 부른다. 화는커녕 짜증 내는 일도 거의 없는 마법의 시간. 그 시간이 우리에겐 절실했다.
간단하게라도 다녀올까 싶어 여기저기 알아보던 남편이 30시간 서울 도심 여행을 제안했다. 코로나19로 외국인 관광객이 사라지면서 서울의 한 호텔에서 고육지책으로 준비한 30시간 스테이 상품이었다. 오후 12시에 체크인해서 다음날 오후 6시에 체크아웃을 하는데 평일 기준 1박 요금이 10만 원이 채 안 됐다. 코로나로 맛집 식당도 갈 수 없고, 호텔 부대시설도 이용할 수 없었지만 인사동, 삼청동, 가회동 한옥마을, 창덕궁 등등... 여유로운 도심 산책에 대한 로망이 있던 터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호텔 리뷰를 찾아보니 조계사뷰가 일품이라고 했다. 보통 바다뷰, 산뷰, 시티뷰는 들어봤어도 조계사뷰라니… 신박했다. 기왕이면 조계사뷰면 좋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체크인 순서로 룸이 배정된다고 하니 가능성이 있었다. 어차피 우린 30시간 꾹꾹 눌러 지내다 올 예정으로 시간에 딱 맞춰 체크인할 거니까.
하지만 조계사뷰 룸을 배정받지 못했다. 아니, 안 받았다. 약속이 있어 남편과 아이들이 먼저 체크인을 했는데 조계사가 앞 건물에 살짝 가려져 보이는 룸밖에 없었다고 한다. 제대로 못 볼 바에야 미련 없이 시티뷰를 선택한 남편이었다.
“반쪽이라도 조계사 뷰가 낫지 않았을까?”
뒤늦게 합류한 나는 아쉬워했다. 사실 남편도 후회를 하던 참이라고 말했다.
우린 아쉬움을 뒤로하고 서울 도심 곳곳을 누볐다. 정장을 입고 바쁘게 다니는 직장인들 사이에서 우린 여행자 놀이를 했다.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무더위 속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지만, 누구 하나 짜증 내지 않았다. 여행 매직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진짜 매직은 밤에 일어났다. 시원하게 씻고 뽀송한 침대에 누워 별 기대 없이 창밖을 봤는데, 반달이 예술처럼 빛나고 있었다.
“와~!!!”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왔다. 우리 네 식구는 창가에 매달려 한동안 달구경을 했다. 만약 반쪽짜리 조계사뷰를 선택했더라면 보지 못했을 달빛뷰였다.
역시 나쁘기만 한 일은 없어!
나만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아 속상했던 그때, 무기력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자존감이 바닥을 쳤던 나에게 달빛은 큰 위로가 됐다. 그야말로 달빛 매직이었다. 세상에 나쁘기만 한 일은 없다더니… 어느 날 갑자기 달빛 매직처럼 좋은 일이 불쑥 고개를 내미는 마법의 순간이 오지 않을까? 하찮은 로망 하나가 추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