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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날로그숲 Oct 21. 2023

마지막 주사

나쁘기보다 다행스러웠던 지난 5년

병원에서 마지막 주사를 맞고 왔다. 처음 주사를 맞을 땐 5년이란 시간이 언제 지나갈지 까마득했는데 마침내 그날이 왔다. 생각 같아서는 마냥 홀가분할 줄만 알았는데 기분이 묘했다. 암 진단 이후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5년 전 유방암 1기 진단을 받았다. 건강검진에서 이상이 발견돼 재검을 받았고 조직 검사를 했다. 그 결과를 듣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내가 내 모습을 봤을 리 없는데 교수님 앞에 나란히 앉아 있는 나와 남편의 모습이 제3자의 시선으로 기억된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결과는 안 좋아요. 무슨 뜻인지 알죠? 결과가 좋지 않다는 건 암이란 뜻이에요.”


이런 게 바로 드라마에서나 보던 암 선고 뭐 그런 장면인가? 그 와중에도 나는 드라마의 한 장면을 상상했다. 드라마에서는 보통 울고 그러던데 나는 눈물은커녕 덤덤했다.


왜 집집마다 누전 안전장치인 일명 두꺼비집이 있지 않은가. 일정한 크기 이상의 전류가 흐르면 자동으로 전류가 차단되면서 두꺼비집이 내려간다. 그 순간 팟! 하고 온 집안의 전자제품이 꺼지면서 세상이 이렇게까지 조용했나 싶을 만큼 고요해진다.


마음속에도 충격 완화장치인 두꺼비집이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일정한 크기 이상의 충격을 받으면 마음속 두꺼비집이 내려가면서 감정이 차단된다. 그 순간 팟! 모든 감정이 꺼지면서 마음이 이상하리만큼 고요해진다. 현실감 제로의 순간.


‘에이, 이건 너무 비현실적이잖아.’


갑작스러운 경로 이탈로 나는 급 환자모드로 전환됐다. 당황할 새도, 슬퍼할 새도 없이 치료 스케줄이 줄줄이 잡혔다. 2주 뒤 종양제거 수술, 한 달 뒤부터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여러 검사와 테스트가 있었고 그 무렵 석 달가량을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매일 항호르몬 제를 복용하고 매달 피검사 및 배에 맞는 항호르몬 주사를 맞았다. 6개월마다 CT, 엑스레이, 초음파 검사를 했고 여기에 1년마다 MRI 및 전신 뼈스캔 등을 추가해 n 연차 검사를 대대적으로 받았다.


매년 가을마다 n연차 검사가 진행됐는데 이때 별문제 없이 무사통과하면 암 환자 등록기간인 5년 중 1년을 클리어하는 셈이었다. 클리어, 리셋, 다시 시작! 그렇게 나는 매해 가을을 기점으로 1년 단위로 살아가는 환자모드에 적응해 갔다. 그리고 다섯 번의 가을을 맞이했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이제 1년 뒤에 봅시다.”


교수님은 심상한 말투로 1년 뒤를 기약하셨다. 나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던 5년간의 암환자 등록기간과 항호르몬치료가 이렇게 끝났다. 생각만큼 드라마틱하지도 마냥 기쁘지만도 않은 묘한 기분.


마지막 주사를 맞기 위해 주사실에 들렀다. 처음 주사를 맞았던 때가 생각났다. 엄청 두꺼운 주삿바늘에 눈물이 찔끔 났던, 이 아픈 주사를 5년이나 맞아야 한단 생각에 몹시 우울했었다. 그때 초등학교 4학년이던 큰 딸이 내게 해준 말이 있었다.


“5년이나가 아니라 5년만 맞으면 되잖아요. 힘내요, 엄마!”


그 말에 힘을 냈던 기억. 스마트폰 메모 앱에 주사 맞을 날들을 해야 할 일로 미리 기록해 놓고 주사를 맞으면 바로바로 지워나갔다. 배에 남겨진 주사자국이 마치 게임 미션을 클리어하고 받는 메달 같았다. 늘어나는 주사자국을 헤아리며 셀프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 잘 견디고 있어! 이 또한 지나가리니!


지난 5년은 분명 힘든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행보다는 다행스러운 순간들이 더 많아서 참 다행이었던 시간들. 매 순간 나를 살린 건 하찮은 로망들이었다.


방사선 치료를 받기 위해 휴일을 제외한 28일 동안 매일같이 병원을 오가던 그때가 마침 가을이라, 병원에서 길만 건너면 덕수궁 돌담길로 이어지는 정동길이라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빨갛게 노랗게 물든 나무들과 가을 햇살이 아른아른 춤추는 돌담 사이를 걷다 보면 복잡했던 머릿속이 하나로 정리됐다.


“가을 정동길, 내 로망이었어! 아, 예쁘다~!”


병원을 오갈 때마다 병약미 넘치는 영화 속 여주인공을 상상했다. 초등학교 시절 월요일마다 운동장 뙤약볕에서 조회를 했는데 교장선생님의 훈화말씀 중 꼭 한 두 명씩 쓰러지곤 했다. 그땐 그게 왜 그렇게 부러웠는지 한 번쯤 쓰러져 보는 게 로망이었다. 조금은 철없는 생각이지만, 그때 이루지(?) 못한 병약미를 지금 누린다 생각하며 나름 즐길 수 있었다.


덕분에 나빴던 기억보다는 좋았던 기억이 더 많다. 좋은 의료진을 만났고, 동병상련의 친한 언니도 생겼다. 힘든 일 앞에서 ‘나 암수술도 받아본 사람이야. 이쯤이야 뭐!’ 가볍게 용기 낼 줄도 알게 됐다. 가족과 친구들의 걱정과 기도 덕분에 내가 이만큼 살 수 있음에,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에 감사한 시간들이었다.


리셋과 시작의 계절, 가을. 나는 무수히 많은 메달과 무용담 하나를 가슴에 품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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