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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서엄마 Apr 06. 2021

뒤늦게 공무원이 돼놓고 왜그렇게 빨리 그만뒀나

나에게 상처를 준 공무원에게

공무원이 인기 직업으로 떠오른 시대를 살고 있다. 박봉에 기계적인 일상의 반복, 칼퇴근, 철밥통. 한때는 마음만 먹으면 들어가기 쉬웠다는, 전설처럼 전해오는 이야기가 지금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됐다. 명문대생들도 몇 년을 전념해야 합격할 수 있는, 고시에 빗대 공시라 불리는 치열한 시험이 되었으니 말이다. 고등학교때 IMF를 맞이한 80년대 생으로 내가 보고들은, 내가 아는 세상에서 공무원은 늘 선망의 직업이었다. 부모님 역시 어릴때부터 내가 공무원이나 교사가 되길 바라셨고, 대학 입시를 앞두고는 교대에 진학하길 바라셨다. 그럼에도 공무원이나 교사는 내가 하고싶은 일은 아니었고 당연히 부모님 말을 듣지 않았다. 한참 의욕이 넘치고 혈기 왕성하던 20대 초반의 나에게는 그보다 더 흥미롭고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 내가 경력직 공무원이 된 건 결혼을 하고 출산과 육아를 앞둔 시점이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온 우주를 다 끌어와야 할 만큼 거대한 에너지와 절대적인 시간이 보장돼야 하는데 현실은 그 당연한 것들이 모두 사치였다. 대다수 직장인들은 3개월 출산 휴가도 감지덕지하며 육아를 남의 손에 맡기거나 조부모가 희생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내 아이를 내 손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퇴사가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나마 워라벨을 입밖으로 꺼낼 수라도 있는 직장이 공직이었기에 30대 초반 필요에 의해 뒤늦게 공무원이 됐다. 실제로 동네에 아이 영유아시절 1년 넘게 육아휴직을 하며 아이를 돌볼 수 있었던 엄마는 공무원 엄마와 대학병원 간호사 엄마 뿐이었다. 사회에 나오자 마자 공무원이 되라던 우리 엄마는 이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걸까.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엄마 말을 좀 귀담아 들을 걸 그랬다. 모로 가도 결론은 공무원이었다.   


결말까지 해피엔딩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실제로 맞이한 현실은 사기업보다 그나마 조금 낫다는 것. 이게 내가 겪은 공직의 현실이었다. 출산으로 육아휴직을 내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웠다. 남자들의 육아휴직도 여전히 드물긴 하지만 그나마 다른 분야보다는 어렵지 않았다. 나의 경우 연년생 출산 육아를 하며 첫 2년여의 육아휴직기간을 거쳐 둘째가 돌이 될 무렵 복귀를 했다. 당시에도 아이가 조금 더 큰 다음 복직을 하고 싶었지만, 내가 복귀해야 할 자리에 있는 직원과의 로테이션을 고려해 복직 날짜를 맞춰야 했다. 그래도 휴직 전과 동일 업무에 무사히 복귀했으니 사회 정서상 그정도도 감사한다. 그러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들어가고 등하원을 도와주시던 부모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돼 다시 육아휴직을 하게 됐다. 법적으로는 육아기 직원의 당연한 권리겠지만 이 또한 사회정서상 공무원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제도는 갖추어져 있으나 당당히 쓸 수 없는 현실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제도보다는 여전히 상사의 영향력이 크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두 번째 육아휴직을 마치고 다시 회사로 돌아왔을 땐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상사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별정직 비서 신분이 맘에 들지 않았던 기관장은 노골적으로 차별을 일삼았다. 일단 자리배치부터가 문제였다. 6급이라는 직급에 맞지 않는, 차를 나르는게 주 업무인 공무직 자리로 발령을 내고는 6급 업무에 비해 너무 쉬운 직무를 하고 있다고 지속적인 압박을 가했다. 업무평가에서 나의 평가자에게 최하점을 주라고 지시하는, 21세기 그것도 공직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있을 수도 없는 일을 지시했다. 기관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의 말 한마디는 아랫사람들로 하여금 부당함도 차별도 모두 무마시키게 하는 굉장한 위력을 지녔다. 찍히면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육아휴직으로 인한 차별을 두지 않겠다며 복귀 후 근무기간이 2개월 이상이면 성과급 액수나 등급에 불이익을 주지 않는다는 규정은 마련됐으나 그 역시 싸그리 무시됐다. 기관장의 원활한 업무처리에 일조하며 성실히 근무한 나에게 주어진 등급은 최하등급이었다. 최하등급은 성과급이 단 한 푼도 지급되지 않는다. 이의제기를 한 나에게 돌아온 답변은 어이가 없었다. 6급 업무에 맞지 않는 자리에 배치해놓고 너무 쉬운 직무를 하고 있어 성과급을 줄 수 없다는, 말인지 방구인지 모를 개소리를 왈왈 짖어댔다.   



그렇게 뒤늦게 공무원이 된 나는 연가사용 등 당연한 권리 행사도 더 심하게 눈치를 봐야 했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는 상상 이상이었다. 자려고 누우면 심장이 빨리 뛰어 잠을 잘 수 없었고, 부당함을 시정하고자 기관장과 한 통속인 직속상사에게 자주 어려운 이야기를 건네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상사의 권위 앞에 늘 물거품이 되었다. 그 압박감은 견디기 힘들었고 생각보다 빨리 공무원을 그만 두게 됐다.


인사과장, 비서실장에게 내가 당한 부당함과 차별에 대해 어려운 얘기를 꺼낼때마다 뭘 원하냐는 그들에게 건넨 나의 대답은 '상식적인' 업무처리였다. 내가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충분히 인정하고 업무평가든 성과급에서든 결과를 달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차별을 위한 차별 앞에 상식은 무너졌고 그들에게 상식은 윗사람의 지시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공직은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친다. 공공의 업무에 종사하는 자들에게 가장 중요한건 사회가 올바르게 돌아가도록 선한 영향력을 주는 것이다. 공무원의 자리가 얼마나 무거운 자리인지, 그 무게를 아는 사람이 공직에 종사했으면 한다. 선한 영향력을 주는 사람들이 마음편히 일할 수 있도록 필요한 제도가 계속 보장되고 그래서 다른 좋은 사람이 자리를 채우게 되는 선순환은 그저 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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