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섹수술 당일, 의사선생님이 마지막으로 몇 가지 간단한 검사를 더 해보자고 하셨다.
검사 후 선생님을 마주하고 앉았더니 왠지 심각한 표정이다.
오늘 시야 검사를 하셨죠? 이게 정호씨가 누른 점들이에요.
보시면 바로 아시겠지만, 이쪽 점들은 하나도 누르지 못하셨어요.
스트레스랑 집중력 저하를 고려해도 이건 보통보다 많이 못미치는 수치에요..
이런 상황에서 저흰 수술을 권해드리지 않습니다.
좀 더 큰 병원이나 대학병원에 가셔서 정밀검사를 받아보기는게 좋을 것 같아요.
소견서 써 드릴게요. 혹시 질문 있으신가요?
그렇게 대략적으로 설명을 해주시고 질문이 있냐고 물으셨다.
난 잠시 멍때리다 "아니요"라고 웃으며 툭 던지듯 대답했다.
아마도 아직 병원 바닥에 그 대답이 굴러다니고 있겠지.
HIV 테스트 때도 얼마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궁금한게 산더미였지만,
궁금한게 있냐는 질문에 나는 갑자기 너무나 피곤해져서 얼른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사실 화가 났다.
사는건 언제나 이따위구나.
나는 아무런 준비도 못했는데 갑자기 혼자 심각해져 있다.
궁금하기 전에 먼저 좀 슬프면 안되나?
대답하기 전에 먼저 좀 침묵하면 안되나?
그러기엔 내 뒤에 다른 환자들이 내 나이 곱절이다.
병원 문을 나오며, 누군가 나에게 울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난 니가 이렇게 아무 말 없이 앉아있는 것도 너무 싫어.
난 이렇게 슬픈데, 넌 할 말이 하나도 없니?
할 말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말할 준비가 안되어있었던 것 뿐인데.
그리고 며칠 뒤, 녹내장 확진을 받았다.
다행히 그 땐 하고싶은 질문도 있었다.
녹내장은 완치가 불가능한 병이에요.
시신경이 서서히 죽는 병인데,
그래도 초기에 발견했으니 관리 잘 하시면 괜찮을거에요.
앞으로 계속 관리하면서 살아야하지만요.
그럼 치료는 현상유지가 목표인건가요?
사실, 현상유지는 어려워요.
그래도 최대한 시신경이 죽는 속도를 늦추는거죠.
이런 말 하면 무섭지만, 치료 꾸준히 받으시면 됩니다.
난 녹내장이 무슨 눈이 초록색으로 변하기라도 하는 줄 알았다.
내가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
현상유지가 목표인 가사노동과 같은 병이라니.
순식간에 내 삶이 따분해진 느낌이었다.
진단서를 가지고 약국을 가니 약상자 하나를 준다.
냉동보관을 해야하고 매일 자기전에 하나씩 투여하는 약.
집에 돌아와 냉장고에 약을 넣었다.
냉장고에 있는 모든 것들이 결국 현상유지를 목표로 하고있었다.
미처 완성되지 못했던 문장들.
하지 못했던 질문과 대답.
결국 소중해서 바로 툭 던질 수 없었던 것들이다.
모두들 그 순간에 대한 애틋함으로 냉장고에 처음 넣어졌다.
대답하기 전에 먼저 슬퍼할 동안
그 문장들은 서서히 상해가고 있었겠지.
그러니 오늘은
오늘을 붙잡고 견디는 것들을
하나씩 꺼내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