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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o Hwang Feb 13. 2020

Yesterday

 영화 예스터데이를 봤다. 노래가 다 중간에 잘려서 영화는 기대이하였지만, 그래도 간만에 비틀즈 음악을 들은 것으로 만족하련다.


영화덕분에 고등학교 때의 일이 생각났다. 우린 남녀 공학이었지만 방학때만 남녀 합반을 했었는데, 그래서인지 방학때의 수업은 왠지 모를 성적 긴장감 같은 것이 맴돌았다. 다들 머리에 왁스를 바른다던가, 화장을 좀 더 열심히 한다던가 하는. 뭐 학기 중에도 쓸만한 녀석들은 모두다 첫사랑 진행중이었지만, 범생이 친구들도 외모에 조금 더 신경을 썼다. 나도 방학때 처음 왁스를 발라봤다. 물론 잘 못발라서 그냥 떡진 머리가 되곤 했지만.


 고3 여름방학이었었나.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이었던 문학 선생님이, 갑자기 방학에는 매 시간 돌아가며 한 명씩 노래를 짧게 부르고 수업을 시작하겠다고 했다. 교실 안에 진동했던 그 긴장감이 선생님도 퍽 재미있었나보다. 문학수업은 거의 매일 있었으니 언젠가 내 차례는 오겠다 싶어 무슨 노래를 부를까 야자시간에 계속 고민했다.


 처음 골랐던 곡은 (나도 도대체 왜 그 곡을 골랐는지 모르겠지만) 벨벳 골드마인이었다. 그 때부터 커밍아웃을 하고싶어 근질거렸던 것인지, 대한민국 고3의 학업 스트레스가 그 정도로 어마어마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단짝 친구에게 말을 했더니 다행히 무반주로 그 곡을 부르는 것은 미친 짓인 것 같다는 소릴 들었다. 심지어 너는 섹시와는 백만광년 떨어진 인간이라고. 단짝친구의 이성적인 충고가 사람 한 명을 살렸다.


 그리고 단짝 친구는 오아시스의 Wonderwall을 불렀다. 보통 한국어로 된 노래를 부를 법한데 굳이 브릿팝을. 워낙 아웃사이더에 반골기질이 충만했던 친구였지만, 또 그런 모습을 좋아하는 소수의 매니아(?)층이 있었나보다. 그 친구는 노래를 부르고 얼마 뒤 내 단짝 친구들 중에서 가장 먼저 여자와 잠을 잤다.


 그 친구는 노래를 끝내고 다음 순서로 나를 지목했다. 그 친구가 오아시스를 불렀으니 나는 비틀즈를 불러볼까 싶었다. 난 저음밖에 내지 못하는 목이니 I will을 불러야지. 그리고 다음 수업시간에 앞으로 나가 I will을 불렀다. 벌벌 떨면서.


 놀랍게도 다음날, 내 책상 안에 남겨진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노래 부르는 모습이 멋있었다고,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쪽지. 그 친구의 이름이 아직 기억이 난다. 왜냐하면 꽃 이름이었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복도를 지나가며 쑥맥처럼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고, 수능을 쳤다. 한겨울, 단짝친구는 옥상에서 ‘마, 나중에 부산으로 다시 와서 서울말 쓰면 죽는디’라며 나에게 고기를 구워주었다. 수능이 끝나고 꽃 이름의 그 아이와 단짝친구들 모두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몇 년 뒤 나는 상경을 했고, 신촌의 스타벅스에서 알바를 했다. 봄날즈음 이었나 신촌역 앞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을 때, 갑자기 누군가 내 어께를 건드렸다. 얼굴이 가물가물했지만 분명 그 아이였다.


“혹시 태오.. 맞나?”

나는 그 꽃 이름을 내뱉었다. 그러자 그 친구가 환하게 웃었다.

“나는 남자친구 만나러 왔어. 왜인지 너인 것 같았는데 정말 맞았네”

 신촌이면 연대생이겠구나. 좋은 학교를 다니네. 갑자기 얼룩이 덕지덕지 묻은 앞치마가 부끄러웠다. 그 아이의 남자친구에게 질투를 한다던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그 아이에게 사귀자고 고백해야 했다던가 하는 그런 감정은 아니었지만, 그냥 먹먹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환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다 나는 점장님에게, 그 아이는 남자친구에게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만나진 못했다. 뭐 혹시 모르겠다. 언젠가 또 다시 마주칠지.


 비틀즈에 얽힌 일화 치고는 꽤 싱숭생숭하지만 그래도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꽤 따뜻한 느낌도 든다. 비틀즈 노래가 따뜻해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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