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도> 3일차 - 21
신라천년보고는, 나머지 박물관은 육지이고 그것은 섬인 것마냥 다리를 건너 도착해야 한다. 다리를 건너는 동안 양옆을 쳐다보면 온통 초록빛인 경주의 논밭이 보이고 그 뒤로 곤한 낮잠을 자고 계실 왕릉들이 보인다. 다리를 건너 오른편에 신라천년보고 건물을 확인할 수 있는데, 나는 홀린 듯 왼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넓은 평지에 빽빽하게 채워진 꽃밭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넓은 땅에 사람이라곤 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꽃밭 사이사이에 만들어져 있는 길을 따라 걸으며, 나는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졌다. 왜 사람이 아무도 없지? 이 넓은 꽃밭 위로 비가 잠시 물러난 깨끗하고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고 그 아래로는 다시 꽃밭이 펼쳐져 있고, 저 뒤쪽으로는 한적한 도로가 보이고 또 초록빛의 논밭이 보이고, 그 앞으로는 다시 꽃밭이 펼쳐져 있고. 그리고 그 한가운데 내가 있었다. 나 혼자 있었다. 내가 벤치를 발견해 카메라를 세워두고 손을 흔들고 빙글빙글 도는 내 모습을 다섯 번 정도 촬영하며 찧고 까부는 동안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나는 누가 이 순간을 방해하기 전에 이 순간이 최고로 완벽할 때 직접 끝내고 싶은 마음 반, 아무도 오지 않을 거라 믿고 잠시동안만큼은 영원히 계속되는 순간을 만끽하고 싶은 마음 반이었다. 혼자인 기분은 끝내준다고 새삼 느끼는 중이었다. 얼른 이 기억을 남겨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팜플렛과 볼펜을 꺼내 들었다.
-여기 꽃밭이다! 나뿐이다! 천, 지, 꽃, 나, 우리뿐이다! 바람만 잠시 왔다 간다. 잘 가! 또 만나! 2021.9.29. 13시 30분-
이제 이 순간은 사진첩을 무대로 영원히 전시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밑으로는 ‘나 아주 행복함. 안 믿길 정도.’라는 설명을 하는 듯한 얼굴이 찍혀있다. 꽃밭에서 빠져나와 신라천년보고 건물로 향하며, 나는 꽃들을 하나씩 찍으며 늦은 인사를 했다. 안녕. 안녕. 오, 너. 특히 안녕. 내 말을 알아들을 이가 아무도 없어서 소리 내 인사했다. 온통 분홍빛인 꽃들을 만나다가 단 세 송이 있는 주황꽃을 발견했을 때는 희한하게 잘 지내라는 말을 하게 됐다.
로비 전시실에서 ‘전 황복사 터 특별공개전’을 하고 있었다. 2016년부터 올해까지 이어진 발굴조사의 성과가 공개되는 자리였다. 조사 지역 북쪽에 ‘도로’가 발견되었으며, 이 도로는 황룡사 터에서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또, 경주 지역에서 이전에 발견된 건물터와는 판이하게 다른 형태의 건물터가 발견되었고, 이것은 왕실의 종묘에 대한 추복적 기능과 왕실사원의 역할을 한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그리고 전 황복사 터는 낭산에 있는데, 낭산은 선덕여왕이 잠들어있는 곳이기도 하다고.
나는 늘 그가 외로운 왕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백성 곁의 대릉에서 잠든 왕들도 있는 한편, 후세에게서 멀리 떨어진 산에 잠들어있기를 선택한 왕의 마음을 감히 상상해 슬퍼하기도 했다.
그런데 왕이시여! 누가 당신을 외롭게 했나요. 그건 지금껏 나였던가요.
선대 왕들의 혼이 머무는 곳에서 당신은 이미 충분한 위로를 받으셨을지도 모른다. 황룡사 9층 목탑으로 언제든지 갈 수 있는 통로를 알고 있기에 당신은 편히 눈감았을지도 모른다. 죽기 전 자신의 능이 있어야 할 곳을 미리 지정했다던 그 왕은 왕실 사원 가까이에 묻히고 싶었던 걸까, 혹은 자신의 마지막 사업이었던 황룡사탑으로 이어진 길 가까이에 잠들고 싶었던 걸까, 그도 아니면 둘 다일지도.
선대 왕의 외로움과 괴로움까지도 함께 잠들어있을 땅 가까이를 영원히 누워있을 공간으로 선택했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자신을 향한 반정에 명분을 내준 격이라고 평가받는 황룡사탑으로 이어진 길 가까이에 누운 마음은 어떤 것일까. 자신의 일생이 마지막으로 손댄 무언가가 현명하지 못했다며 후대의 비난을 받는 와중에도 언제든지 그곳으로 갈 수 있는 길을 남겨둔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남들이 뭐라 해도 자신에게는 애틋한 유품 가까이에 잠드는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언젠가 내가 잠들 곳을 정해야 할 때가 오면, 그때 나는 하나를 남겨두긴 했을까. 나는 그 옆에 잠들 수 있을까. 나는 산 자의 거짓된 숨결과 웃음소리를 부러워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있을 자신이 없고, 풀이 살랑이고 동시에 낙엽이 지는 풍경을 감당할 자신이 없고, 사람들이 각자의 일상과 사진으로 섞여 들어가는 모습을 목격하며 깜깜한 초록빛에 잠길 자신이 없는데. 나는 잠들 수 있을까. 누군가 나의 일생이 천년 전에 이미 끝났음을 슬퍼해 줄 사람이 있을까. 나의 선택 중 무엇이 실패였으며 동시에 아름다웠는지를 기억해줄 사람이 있을까. 나는 천년을 만들고 잠에 들 수 있을까. 쓸모없고 아름다운 천년을.
또 천년이 쌓일 이 땅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아직 아무 길도 만들지 않았다.
나는 이제 전시 수장고로 걸음을 옮겨, 분황사 유물들이 나란히 누워있는 것을 본다. 나는 또 한 번 감히, 분황사 완공 기념행사 때의 당신을 떠올려본다. 당신이 이 기와에 눈길을 한번 주셨을까요. 떨어뜨린 이 구슬이 혹 당신의 것일까요. 답이 없을 물음을 그 옆에 두고 나왔다.
육지로 가는 거북이의 마음으로, 나는 다리를 다시 건넌다. 반대편에서는 점심시간을 끝낸 직원들이 하나둘 다리를 건너 일터로 돌아가는데, 나는 옆에 있는 풀떼기마저도 카메라에 마구 담는다. 우리는 서로를 지나쳐 반대로 걷고, 나는 새삼 느낀다. 박물관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일상과 여행이 교차하는 살아있는 공간임을.
‘보살은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자 여러 실천을 행하는 자’라는 설명을 보고 고등학교 윤리 시간으로 잠시 돌아갔다가, 당시 백성들에게는 세상의 모든 질병을 없애주고 배고픔을 없애준다는 약사불이 가장 각광받았다는 문장을 인생 처음으로 읽어보며 다시금 현실에 복귀할 수 있는 공간. ‘최치원 진영’을 엑스선과 적외선으로 촬영해 완벽히 복원할 수 있었다는 설명을 보고, 시간이 묻어둔 것을 시간이 밝혀냈다는 말장난을 떠올리다 불현듯 감사하게 되는 공간. “천년 묵은 옛터에 풀은 여전히 새롭”다는 서거정의 말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음을 확인하는 공간.
분명히, 몸과 정신이 비로소 하나로 경주 땅에 모인 느낌이 들었다. 도시에 잠든 역사는 내가 똑똑 문을 두드리면 기꺼이 잠에서 깨어나 주는구나. 눈이 그걸 깨닫자마자 급하게 정신을 불러들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친절을 한번 겪고 자연스레 다음 친절을 고대하는 마음으로 걸을 수 있던 것이다. 내가 무슨 질문을 하더라도 이 도시는 답을 해줄 것 같은 이상한 모양의 기대.
그러나 이 땅이 끝까지 모른 척 덮어둔 누군가의 이름들이 떠올라 나는 그냥 입을 꾹 다문다. 못해도 세 명 분의 삶이 내 손가락에 접힌다.
나는 마지막으로 국립경주박물관이 출판한 두껍고 무거운 사만 오천 원짜리 책을 사들고 박물관에서 나왔다. 제목은 ‘황룡사.’ 왠지 그 책이 선덕여왕의 유품인 듯 느껴져 소중히 품에 안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지금은 터만 남은 그 공간을, 빠져나가는 거품을 손에 쥐려 애쓰는 사람처럼 가슴과 옆구리에 끼고 싶었다.
곧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