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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Jul 16. 2024

책 : 허송세월

2024. 7. 16.

소주. 아아! 소주. 한국의 근대사에서 소주가 정신의 역사와 대중정서에 미친 영향을 사회과학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가공할 소비량에도 불구하고 소주는 아무런 아우라를 갖지 않는다. 소주는 대중의 술이며 현실의 술로서 한 시대의 정서를 감당해 왔지만 풍미가 없고 색깔도 없고 오직 찌르는 취기만 있다. 소주는 아귀다툼하고 희로애락하고 생로병사하는 이 아수라阿修羅의 술이다. 소주는 인간의 기쁨과 슬픔, 소망과 좌절을 멀리 밀쳐 내고 또 가까이 끌어당겨서 해소하고 증폭시키면서 모두 두통으로 바꾸어 놓는다. 소주는 생활의 배설구였고 종말처리장이었는데, 나 역시 거기에 정서를 의탁해서 힘든 날들을 견디어 왔다.

회사 동료들과 다투고 나서 화해하자고 마시는 술은 대개가 소주였는데, 화해의 술자리에서 또 싸웠고, 헤어져서 각자 마셨다. 퇴근 후에 동료들이 모여서 회사 사장, 국장, 부장을 욕하고, 야당을 욕하고 여당을 욕하고 정부를 욕하면서 소주를 마셨는데, 이런 날은 아무 득이 없이 헛되이 폭음했고, 그다음 날 아침에 오장이 녹아내리도록 뉘우쳤다. 이런 아침에 머리는 쪼개지고 창자는 뒤틀리고 마음은 자기혐오로 무너졌다. 소주는 삶을 기어서 통과하는 중생의 술이다. 나는 소주를 많이 마시기는 했지만, 소주의 쓰라린 세속성을 소화해 내기는 어려웠다. (14~15쪽)



장마의 끄트머리, 가파도에서 써놓은 원고를 정리해서 후배 출판사에 보냈다. <가파도에서 읽는 장자>는 곧 출간될 것이고, <가파도에서 읽는 노자>는 우수출판콘텐츠에 응모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가파도에 오면서 꼭 써야겠다고 결심한 두 권의 책이 완료되었다.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속이 후련하다. 이제는 좀더 편안하게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의무적으로 쓰는 글은 내려놓으려 한다. 쓰고 싶은 글만 쓸 수 있는 작가는 엄청난 행운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 그런 행운은 오지 않겠지만, 그 방향으로 삶을 조정하고 하고 싶다. 바닷가 바위가 물결에 닳아가듯 모난 부분은 깎이고 부드러워져 가끔 반짝이고 싶다. 나이듦이 그러했으면 좋겠다.


나에게 휴가를 주는 기분으로 김훈의 <허송세월>을 읽고 있다. 김훈이 48년생이니 나하고 16년 차이가 난다. 충분히 늙었는데도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책 제목 자체가 인생의 경륜을 드러내고 있다. '허송세월'이라고 쓴 사람은 인생을 잘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김훈은 세월과 더불어 멋지게 살아가고 있다. 내 독서인생애서 김훈이 빠졌다면 얼마나 쓸쓸했을까? 나 역시 김훈의 글을 읽으며 늙어가고 싶다. 처음에 인용한 부분은 서문격인 '늙기의 즐거움'에 나온다. 와인과 막걸리를 논하더니 소주를 논하는 부분에서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내 경험과 많이 겹치기 때문이다. "소주. 아아! 소주."라는 첫 문장이 감탄과 탄식의 역사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김훈은 정서에 다시 정서를 얹어 새로운 정서를 증폭시키는 반복적이면서 변형적인 문체 구사의 달인이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어느새 가랑비에 속옷 젖듯 글 속으로 스미게 된다.


소주 다음에는 사케를 소개한다. 우선 사케가 만들어지는 풍경을 그리고, 그 속에 자신의 경험을 담고, 한 마디로 정리한다. "사케는 겨울의 술이고, 나이 든 사람의 술이다." 다음에는 위스키. "내가 즐겨 마신 술은 위스키다."로 시작되는 문장. 그리고 "온 세상 사람들이 너도나도 위스키를 마신다 해도 위스키는 공동체의 술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술이다. 위스키는 단독자를 정서의 정점으로 이끌고 간다. 그래서 위스키를 좋아하면 혼술을 자주 마시게 되고 알코올중독자가 되기 쉽다."


그러다가 3년 전부터 심혈관 계통의 병으로 치료를 받고 있는 작가의 현실을 소설처럼 그려내며, 술을 마시지 못하는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쓴다. "술은 멀어져 갔지만, 나는 아직 술을 끊은 것이 아니다. 나는 희망의 힘에 의지해서 살지 않고 이런 미완성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역시 김훈이다. 내 그럴 줄 알았다.


고작 머리말 앞쪽만으로 이 만큼 쓰고 말았다. 오늘은 그만 쓰겠다. 


<추신>

그래도 담배이야기는 해야지. 뒤에 오는 담배 이야기는 더욱 재밌다. 나는 처음으로 김훈의 흡연과 금연의 역사를 알게 되었다. 난 아직도 담배를 끊지 못하고 있다. 김훈도 아직 꿈속에서는 담배를 끊지 못했다. "지금도 가끔씩 꿈속에서 담배를 피운다. 중생의 어리석음은 한이 없는데, 나는 이 어리석음과 더불어 편안해지려 한다." 역시, 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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