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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헌은 그날 이후로 공원에 나오지 않았다. 진헌이 앉아있던 자리에는 판넬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판넬 주인이 없으면 치울법한데, 공원 직원도, 상인들도, 진헌에게 연기를 샀던 사람들도 그 누구도 판넬을 치우지 않았다. 비가 오면 판넬이 젖을까 봐 번데기 아주머니는 판넬을 소중히 보관했다가 날씨가 좋아지면 다시 판넬을 벤치에 세워두었다.
사람들은 진헌이 궁금해서 미리에게 진헌의 근황을 물어봤지만, 미리는 “아저씨 당분간 일이 있어서 못 나오신대요. 아마 곧 나오실 거예요.”라는 말만 대충 둘러댔다.
진헌을 아는 사람들은 다들 벤치를 지나가며 한 번씩 발길을 멈추고 진헌의 판넬을 한 번씩 보고 갔다. 다들 그리워했다. 진헌의 연기를, 진헌의 위로와 응원을.
시간이 더 지나자, 진헌의 판넬에는 메모지들이 붙기 시작했다.
⌜보고 싶네. 연기 총각, 맨날 멋진 남자 고백 듣다가 안 들으니까 쓸쓸해⌟
⌜형~ 저 규민이에요 저 보컬 학원 다녀요. 형 근데 언제 와요?⌟
⌜배우님! 저 덕분에 상사한테 좀 대들기 시작했어요. 근데 배우님 어디 갔나요⌟
⌜그리워요.⌟
미리도 진헌이 다시 오지 않았을까 하고 매일 공원을 찾아갔다. 그리곤 진헌이 없는 벤치를 잠시 바라보고는 집에 가는 날이 많았다.
“야 가서 쓰레기 버리고 와라.”
미리는 공원에 갔다가 집에 들어오니 아빠는 여전히 누워서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미라는 말없이 쓰레기봉투를 집어 들다가 티브이만 보고 있는 아빠를 노려봤다.
“지겨워 내가 쓰레기야? 들어오면 잘 다녀왔냐고 인사 한번 못해? 왜 맨날 들어오자마자
쓰레기 버리러 나가라 그래? “
“뭐? 야 이년아, 아빠가 힘들게 장사해 돈 벌어서 학교 보내주고 비싼 밥 처먹어줬으면 쓰레기라도 버려야 할 거 아냐?”
“아빠가 밥을 차려줘? 내가 차려 먹고 아빠 밥도 내가 차렸지! 살림은 내가 다 하잖아, 겨우…. 겨우 학교 가는 등록비만 내주지 아빠가 해주는 게 도대체 뭔데!
이 지긋지긋한.. 욕만 가득한 한 이 집에서 있기 정말 지겨워 정말! 너무 싫다고 나도 엄마처럼 나가버리고 싶…!”
짝-!
미리는 세게 맞은 오른쪽 볼을 감쌌다. 아빠가 삿대질하며 계속 욕을 해대고 있었지만, 귀가 멍해 잘 들리지 않았다. 미리는 바로 집을 뛰쳐나와 공원으로 향했다. 미리는 연락해도 대답 없는 진헌에게 또 문자를 남겼다.
“아저씨…. 저도 아저씨한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지금 한 번만 공원에 나와주면 안 돼요? 제발요 기다릴게요”
1시간 정도 미리는 많은 생각을 하며 벤치에 앉아 진헌을 기다렸다. 진헌이 조용히 다가와 어느새 판넬에 붙은 메모지들을 보고 있었다.
“뭐야, 내가 안 치우면 누가 갖다 버릴 줄 알았는데, 뭐가 더 많아졌네?”
미리는 진헌을 보자마자 활짝 웃었다가 애써 미소를 참으며
“아저씨 물건은 자기가 직접 치워야죠 이걸 누가 대신 치워요?”
진헌은 씩 웃으며 “잘 지냈냐?” 하며 미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진헌의 모습은 조금 수척해 있었고 머리는 덥수룩하고 수염도 많이 길어 있었다.
“저야 뭐 잘 지냈죠.. 아저씨는 수염이 덥수룩.. 흑... 흑” 미리가 서럽게 엉엉 울기 시작했다.
“흐어어어엉... 헛어... 아저씨.. 그동안... 흑흑 왜 안왔.. 흑흑”
진헌은 미리 앞에 쭈그려 앉아서 미리를 바라본다.
“왜 무슨 일 있었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데?”
한참을 울다가 미리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아저씨…. 흑…. 배우 그만두지 마요.. 흑흑 제발 그만두지 마요”
“그동안 아저씨한테 안 한 얘기가 있었는데.. 사실 우리 아빠… 맨날 욕만 하고 미운 말만 계속하는 아빠예요. 고맙다, 어서 와라, 학교 잘 갔다 왔니, 밥은 먹었니?라는 말을 모르고 사는 그런 아빠.”
“늘 쓰레기 버리고 와라, 네가 뭘 할 줄 아냐, 너는 쌍년이다. 이년아,, 저 년아…. 하면서 단 한 번도. 한 번도 다정한 말을 해주지 않아요.
“그래서 전…. 늘 다정한 말이 듣고 싶었어요. 응원이 그리웠어요. 살면서 한 번도 그런 말을 듣지 못해서.. 근데…. 흑, 재미 삼아 아저씨한테 아빠 연기를 해달라고 했었는데”
“그냥.. 우리 딸 너무 착하다. 우리 딸 학교 잘 갔다 왔니? 점심은 잘 먹었고?”
“그때 그 대사가 참 평범한 말인데, 아저씨가 말해주니까 제게는 아주 따듯한 햇살 같았어요. 아저씨는 아저씨의 연기의 힘을.. 말의 힘을 모르는 것 같아서.. 말해주고 싶었어요 “
“그게 얼마나..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는지 알았으면 해요. 아저씨 동생도.. 그래서 그런 아저씨 따듯하게 말해주는 모습이 다시 보고 싶어서.. 연극을 보러 간 게 아닐까요? 분명 그랬을 거예요. 아저씨 그만두지 마요 여기 공원 사람들도 다들 아저씨 연기에 한 번씩 웃고 또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잖아요. 포기하지 마세요. “
미리는 눈물 반 콧물 반 아주 서럽게 울면서 진헌에게 진심을 다해 말했다.
진헌은 그렇게 우는 미리를 바라보다 하늘을 바라보다가 땅을 바라보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나지막이 진헌은 얘기했다.
“위로를 받는다는 것…. 응원을 받는 것은 이런 기분이구나”
미리의 울음소리와 귀뚜라미의 울음소리가 공원의 밤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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