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가루는 구했는데 계란을 못구한 어느날.
아이들이 학교 문턱조차 가보지 못한지 어느덧 4개월을 훌쩍 넘기고 있었고 그사이 방학도 했다. 새 학기를 맞아야 할 21년 8월 어느 날 아파트 주민들이 웅성웅성, 또 한바탕 난리가 났다. 지쳐있는 그들의 얼굴, 더이상은 못 버티겠다는 얼굴. 이유인즉, 호치민 정부에서 '통금시간을 오후 5시'로 정한다는 지침이 곧 내려 올 것이라는 정보를 누군가 입수를 했고, 다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고민 중이었다. 가끔은 남들보다 빠른 정보 입수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리까리 할 때가 있지만, 이번만큼은 그 소식을 접한 뒤 우린 몸소 실천에 옮겼어야만 했다. 하지만 다들 '설마', 한편으로는 '괜찮겠지' 하는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만 볼 뿐 누구 하나 확실하게 '그거 헛소문이래'라는 말을 내뱉지 못했다.
"5시 이후 밖에 돌아다니면 경찰한테 잡혀 간 데, 벌금을 내야 한다는데?"
"봉쇄된 구역은 들어갈 수 없고 철망 앞에서 물건을 전달하거나 받을 수 있다는데"
"에이 설마?"
"강아지 산책 역시 불가능하다는데?"
" 작년 코비드 때도 그런 말이 나돌았지만, 그냥 그랬잖아~~"
"아니야. 이번에는 심각한 거 같아."
" 우리도 다시 한번 사재기해야 하지 않을까?"
" 또? 이전에도 이런 소문이 돌아서 사재기를 했지만, 결국 슈퍼는 그냥 다 문을 열었잖아~ 아우~냉장고에서 썫어 버린 음식이 더 많았던 거 같아. 채소와 과일은 시들다 못해 형태를 잃어버린 체 냉장고 안을 이리저리 굴러다녔고 냄새까지..."
"난 아파트에 빌트인 냉장고라 성능도 좋지 않고 작아서 무얼 쟁겨 놓기는 불가능한데.."
"그리고 우리의 LAZADA가 있잖아." (온라인 쇼핑 LAZADA)
"그래. 맞아 괜찮겠지. 헛소문일 거야. 오후 5시에 모든 영업을 종료하고 바깥출입까지 통제를 한다는 건 불가능해~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그래도... 여긴 호치민인데..."
저렇게 모여 쓸데없는 걱정을 할 시간에 우린 마트에 장을 보러 갔어야 했었다. 믿었던 온라인 쇼핑 LAZADA 역시 타격을 받았고 난 고양이 사료를 받을 수 없었다.
오전 산책을 마치고 찝찝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머릿속에서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줄지어 생겨났고 혼자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나머지 난 나 자신을 달래고 있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괜찮았어. 그래. 설마 통금까지? 직장인들은 그럼 어떻게 출근하고 퇴근하는 거야? 에이.. 말이 안 돼. 아무리 베트남이 사회주의 국가라지만 이렇게까지 하겠어?'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도는 사이 샤워를 마친 뒤 아이 아침을 준비하고, 아이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새로운 학년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나러 온라인 수업을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오전 8시 30분. 남편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 집에 먹을 거 있어? 빨리 확보해야 해. 농업, 수산업, 모든 유통업계 납품하는 공장 쪽에 코로나가 번져서 지금 식품이 원활하게 공급이 못 되고 있다는 속보가 정부에서 내려왔어. 서둘러야 해."
"어?? 뭐라고?"
"대형할인점은 가지 말고 동네 슈퍼를 뒤져봐. 대형할인점은 위험해."
"응??? 지금 당장?"
그는 다급하지만 차분한 어조로 자기 할 말만 한 뒤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그도 지금 정신이 없어 보였고 가족이 걱정되는 마음에 서둘러 전화를 한 듯 보였다. 웬만해선 전화를 하는 사람이 아니니깐...
동시에 아는 동생 두 명한테서 카톡으로 연락이 왔다.
" 언니, 서둘러야 해. 지금 움직여. 근처 어디든 가서 먹을 거부터 확보해."
그 친구들도 남편한테서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그제야 우린 심각성을 인지했고 각자 위치에서 가까운 슈퍼를 뒤져가며 장을 보기 시작했지만 이미 늦었더라. 우린 서로 도착한 마트 사진을 교환하고 어디에 무엇이 있다, 없다는 정보를 주고받았지만 사진 속 진열대는 허망하게 시리 텅텅 비어 있었다. 두 눈이 믿기지 않았다. 현재 상황을 인지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워낙 아침 일찍 움직이는 베트남 사람들이 다 휩쓸고 간 마트와 슈퍼는 휑했다. 진열대 물건이 없었다. 텅텅 비어 있었다. 마치 진열대가 상품인 듯 했다. 휴지와 공산품 역시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난 급한 대로 남아 있는 파스타 면과 소스를 주섬주섬 카트에 담았고 냉동식품 중 냉동 야채와 쉽게 먹을 수 있는 것을 담았다. 다시 차를 타고 가까운 한국 마트로 이동했지만, 그곳 역시 남아 있는 물건이 거의 없었다. 다시금 냉동고를 기웃거렸다. 남아 있는 만두, 치킨너겟, 김말이, 어묵, 미니 산적 등 손에 잡히는 데로 카트에 옮겨 담았다. 그때까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무서웠고 두려웠다. 저장 식품과 간장, 국간장, 카레 가루부터 닥치는 데로 물건을 집어 들었고 어느새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버려 굶은 체로 집에서 혼자 온라인 수업 중인 아이가 걱정되었다.
'사장님, 혹시 내일 오면 물건이 있을까요?'
" 아니요. 지금 공급 업체에서 다 연락이 왔는데, 공장 직원 중 코로나 확진자가 나와서 가동이 중단 될 것 같다고 연락을 받았어요. 그리고 곧 통금 시간까지 시행을 한다는 통보를 받아서 컨테이너를 못 풀 것 같아요."
" 아.. 그렇군요."
그사이 다시금 들려 오는 코로나 소식. 벤탄 시장 꽃시장에서도 확진자가 다녀가서 코로나가 퍼져 버렸다는 소식이었다. 어쩌지…. 정말 어떡하지? 동네에 있는 슈퍼 4곳을 넘게 이동하며 겨우겨우 남아 있는 고기와 생선 그리고 밀가루를 손에 넣었다. 오직 머릿속은 동네 슈퍼 위치와 지금 필요한 것보단 만약 전쟁이 났다면 뭐가 필요한지부터 생각을 하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나도 잘 모른다. 왜 내가 그때 전쟁을 떠올렸는지. 슈퍼를 돌아다니며 남아 있거나 눈에 보이는 것은 모조리 쓸어 왔다. 장을 보면서 문 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만약 통장에 잔고가 없다면 난 사재기를 할 수 있을까? 이 와중에 현금이 정말 중요하구나 라는 뜬금없는 생각까지 했다.
믿을 수 없었고 믿기지 않았다. 눈으로 직접 본 이 모든 광경은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이틀 뒤 5시 통금 금지령이 내렸고 생뚱맞게 알 수 없는 마트 방문 날짜 쿠폰이 생겨났다. 회사들도 오후 5시 전에 업무를 종료했고 통금시간 5시 이후 도로는 적막했다. 경찰들이 도로에 깔렸고 다음 날 개를 산책시키다 벌금을 물었다는 둥, 기사 아저씨가 퇴근길에 경찰한테 잡혀서 더욱 일찍 퇴근해야 한다는 둥, Grab 기사가 그날 하루 번 돈을 벌금으로 다 냈다는 둥 이야기가 저 멀리 어디서 들려 오고 있었다.
아 참, 난 계란을 구하지 못했다. 며칠 뒤 아파트 안 슈퍼에서 구할 수 있었다.
아이가 온라인 수업을 마친 뒤 나오면서 하는 말
'엄마, 누구 엄마가 오늘은 밀가루를 살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데, 우리는 밀가루 있어?"
" 응 그럼~ 그런데 우리 집은 계란을 못 구했어."
그 밀가루를 산 아이 친구 엄마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밀가루 한 봉지에 행복하다는 탄성이 나올 정도로 그녀 역시 나와 같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