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도 계속 그리고 싶었고 운동도 꾸준히 하고 싶었는데, 시간과 돈을 핑계로 이어오지 못했어요. 나만의 세계를 확장하기 위한 소비가 늘 육아나 가계 소비 뒤로 밀렸던 것 같아요.
‘생활비 쓰는데도 눈치 보이는데 어떻게 나만을 위해서 당당하게 돈을 쓸 수 있나?’라는 생각에 머뭇거렸지만, 한 달에 5만 원만 써보자고 마음먹고 카페 가기, 책 사기 등 소소하게 시작했어요.
지금은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그녀들이 '전UP주부였던 시절'을 돌아보며 들려준 말은 마치 거울처럼 나의 과거와 현재를 고스란히 비쳤다. 원체 소비를 잘 못 하는 성격인데, 결혼하고 전업주부로 살면서 소비위축은 더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소비의 규모가 줄어드니 마음 씀씀이도 덩달아 졸아들었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다 보니, 근검절약은 미덕이기보다 짠내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출 내역을 기품 있게 관리하고 싶어졌다.
글에서라도 소비의식을 마구 풀어헤치고 싶어서 이런 저런 제목도 궁리해보았다. '돈지랄'이라는 단어를 입밖에 내는 것부터가 일탈이었다. 로또에 당첨된다한들 나는 돈 잘 쓰는 여자가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런 면에선'돈 잘 쓰는 경지'가 '돈 잘 버는 경지'보다 높아 보이기까지 한다.
'돈을 잘 쓴다는 건 뭘까?'
내가 생각하는 돈 잘 쓰는 경지가 뭔지 자문하자마자 정반대의 기억이 소환됐다. 내 생애 가장 돈을 잘 못쓴, 15년 전의 사건으로 여전히 생생하게 돌아갈 수 있는 건 그만큼 쪼잔하고 쪽팔리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액수와 상관없고, 그 둘을 연결 짓는 건 어쩐지 속물 같았다.
마음이 액수와 상관없기는 개뿔. 이제 와 생각하니, 순수함이 아닌 순 미련함이다. 어떤 변명으로도, 2만 원을 더 지출하고 싶지 않았던 속내를 포장할 수가 없다. 이후로 나에겐 특정 지출에 있어 하나의 중요한 기준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