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에 꽂혀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에세이
도시보다 훨씬 추웠던 겨울, 어느 지방의 응급실에서 나는 차게 식은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뜨거운 물이 담긴 페트병을 온몸으로 부여잡은 나는 생각했다.
‘오늘만 버티면 20일 남았다’
눈을 질끈 감은 채, 한 손으로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페트병을 필사적으로 부여잡고 있었다. 나를 응급실로 데려다준 동승자는 뜨거운 물이 담긴 새로운 페트병을 내게 내어주고는 식어버린 페트병의 물을 새로 갈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일주일 내내 계속된 빗속 액션씬 촬영 때문에, 감독님의 액션 신호에 맞춰 강우기에서 콸콸 쏟아져 나오는 장대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버텨내야만 했다. 아무리 방수성 좋은 우비를 장화 끝까지 밀어 넣고 튼튼한 청테이프를 칭칭 감아 막아봐도, 사이로 새어 들어온 빗물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실은 쇳덩이 같은 촬영 장비들에 긁혀 우비가 자주 찢어진 탓에 어떠한 노력도 전부 무색해졌다. 그래서 안에 입은 옷부터 속옷까지 매일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리고 매일 밤 숙소에서 퉁퉁 불어 지친 발을 볼 때마다 발에게 미안해했다. 이렇게 정신없이 아픈 와중에도 장화 속에서 온종일 퉁퉁 불어 하얗게 질려있을 내 발가락들의 안부를 걱정해야 하다니. 발가락을 꼼지락거려서 아직 감각이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고 난 후에야 이내 마음이 놓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20일만 버텨 내면 이 영화 엔딩 크레딧에서 내 이름을 볼 수 있어!’
'참내, 고작 20초 만에 후루룩 사라져 버릴 내 이름 하나 걸어 보자고. 꼭 이렇게까지 힘겹게 버텨내야만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멈출 줄 모르고 열심히 달려온 내 열정의 온도가 가슴팍에서 식어버린 페트병 물 온도처럼 삽시간에 차게 식었다. 그곳의 모든 것이 싫었고 그곳의 모든 사람도 미웠다. 이때, 눈치 없는 나의 동승자는 식어버린 내 페트병을 뺏어 새 페트병으로 갈아주고는 또다시 자리를 비웠다. 뜨거운 물이 담긴 새 페트병을 끌어안은 내 가슴은 다시금 서서히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허들에 또 걸려버린 나의 분노는 오늘도 역시나 오래가지 못했다. 만약 그 허들을 훌쩍 넘어 불같이 화를 낼 수 있다면, 지금까지 쌓아 온 모든 것들은 포기해야만 하겠지만 내 발가락들의 건강과 감각을 정상적으로 되찾을 수 있을 테고, 동승자가 가져다주는 뜨거운 페트병을 끌어안고 응급실 침대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을 필요도 없었을 테다. 그러나 오늘도 허들에 걸려버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결국은 말의 요점과 결론까지 잃어버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20초 정도 크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돌아가는 차 안, 나란히 앉은 나와 동승자 둘 사이에는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도시보다 훨씬 추웠던 어느 지방의 촬영 세트장 입구에는 매 아침 아픈 사람들을 응급실로 호송해주는 제작팀 스타렉스 차가 항시 대기 중이었다.
[날것? 날것!] : 단어에 꽂혀 이야기를 풀어내는 에세이
'[날것? 날것!] : 단어에 꽂혀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에세이'의 제목은 날것 그대로의 솔직한 글을 뜻하는 ‘날것’과 날개가 돋친 듯 승승장구 높이 날고 싶다는 염원을 담아 본 ‘날것’, 한 단어가 가진 중의적인 의미에 꽂혀 재치 있게 표현해보았습니다. 주로 특정 단어나 단어가 가진 뜻에 꽂혀 보통의 일상 이야기를 풀어내는 걸 좋아합니다. 현상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첫 순간에 느껴지는 날것 그대로를 기록하기 위해 노력하며 ‘날것?’으로 도약하여 ‘날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