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반 컵

단어에 꽂혀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에세이

by 반년작가



물이 절반가량 담겨있는 컵을 본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 다른 말을 내뱉었다.




“반이나 있네!”

“반밖에 없네!”




물 반 컵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그 사람의 성향과 가치관 또는 그 사람이 처한 처지까지도 알 수 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만약 나 자신을 물 반 컵에 비유한다면, 나를 바라본 나는 ‘반이나 차 있네’라고 말했을 것이고, 나를 바라본 그 사람은 ‘겨우 반밖에 없네’라고 말했을 것이다. 주어진 상황은 똑같은데 서로 이렇게나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게 나는 매 순간 힘에 부쳤다.



나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고 태어난 사람은 아니지만, 나 스스로 잘 해낼 수 있는 영역이 반이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나를 새롭게 채워 넣을 수 있는 공간이 아직 반이나 남아있다는 게 정말 좋았다. 내 안에 무언가를 채워갈 때마다 마치 텅 비어있던 공간에 가구들과 살림살이들이 하나씩 채워지는 걸 바라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든든했다. 점점 사람 사는 집이 되어가는 공간을 보니 채우면 채울수록 계속 욕심이 났고,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지는 것에 보람을 느꼈다. 때로는 다음에는 어떤 걸 새로이 채워볼까 설레기도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나를 볼 때마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의 한숨에는 너는 갈 길이 한참 멀었다는 속마음이 잔뜩 담겨 있었다. 그 사람은 매사에 불만족이었고 내게 불만이 많았다. 뒤에서 전해 들은 얘기로는 내 능력이 아직 많이 부족하고 일하는 방식이 소극적이어서 마음에 안 든다고 말했다. 타 부서인 데다가 나와 전혀 다른 일을 하던 사람이 나를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조금 황당하고 기분이 썩 좋지 않았지만, 나의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는 바였고 개선할 의지는 충분히 넘쳤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평소에 그 사람을 좋게 보고 있었기에 그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었고, 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그 말은 오히려 나에게는 긍정적인 자극이 되었고, 좀 더 적극적으로 속도를 올려 모든 노력을 쏟아부었다. 하루빨리 시원한 물 한 컵이 되어 그 사람의 갈증을 해소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몸에 과부하가 오면서 건강에 이상 신호가 왔고 모든 것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의 양과 책임은 당연하다는 듯 늘어나는데, 오히려 하루하루 빠르게 지쳐가는 나를 보았다. 대체 어느 정도를 채워야 그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양이될는지 도통 가늠하기 어려워졌을 때쯤, 어렵사리 용기를 내서 그 사람과의 면담 자리를 만들었다. 나에 대한 불만 사항이 무엇인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을 때, 그 사람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버럭 화를 냈다.




“반밖에 없네!”




갑자기 온몸에 힘이 쭉 빠져버렸다.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건 그 사람에게 좋게 인정받는 건 둘째 치고,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지만 나에 대한 불만 사항이 단 하나도 해소된 바가 없다는 점이었다. 나는 남들보다 손이 느린 편도 아니었고 일 처리를 엉망으로 하거나 노력을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채우고 채워도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어 넣는 것처럼, 그 사람에게 나는 여전히 물 반 컵짜리였다.



긴 고민 끝에, 나는 그 사람을 절대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더는 그 사람의 관점에 나를 맞추지 않기로 했다. 인정받고 싶어서 괜한 욕심을 부리다가 나의 영역을 전부 그 사람에게 침범당한 기분이 들었다. 부족한 부분에만 집착해서 나 자신을 절벽 끝으로 몰아세우기보다는, 본연의 내가 가진 관점과 삶의 태도에 좀 더 중점을 둔 채 나는 나대로 진행해보기로 했다. ‘반이나 차 있는’ 나를 충분히 격려해가며, 나에게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 맞춰 남은 부분은 성실히 채워 나갔다. 내가 소화해낼 수 있을 양과 속도에 맞춰 일의 균형을 잡고 보니, 컵에 물이 다시 채워져 가는 기분이 들면서 건강도 차츰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날 이후 나는 그 사람 눈 밖에 나고 말았다.









[날것? 날것!] : 단어에 꽂혀 이야기를 풀어내는 에세이

'[날것? 날것!] : 단어에 꽂혀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에세이'의 제목은 날것 그대로의 솔직한 글을 뜻하는 ‘날것’과 날개가 돋친 듯 승승장구 높이 날고 싶다는 염원을 담아 본 ‘날것’, 한 단어가 가진 중의적인 의미에 꽂혀 재치 있게 표현해보았습니다. 주로 특정 단어나 단어가 가진 뜻에 꽂혀 보통의 일상 이야기를 풀어내는 걸 좋아합니다. 현상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첫 순간에 느껴지는 날것 그대로를 기록하기 위해 노력하며 ‘날것?’으로 도약하여 ‘날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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