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구 혼자 고군분투해야하는 힘쓰는 일들은 그래도 공익근무 친구들이 많이 도와준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내일 둘 다 병가를 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예감 아닌 예감과 함께 민구는 공익근무요원들과 염화칼슘을 트럭에 가득 싣고 제설함 정비를 시작했다.
아직 겨울의 쌀쌀함이 느껴지기엔 이른 11월. 두 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하늘은 한겨울의 어느 날과 비슷한, 지는 해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 시간 이상 작업시간이 예상되니 출장을 달았다.
요즘 공무원들이 출장도 가지 않고 출장비를 받는다고 난리인데, 이건 정말 출장이 맞다. 관용차 사용도 함께 체크했다.
“김 주무관님. 제설함 정비 하시나 보네요.”
땀을 뻘뻘 흘리며 '제설함 지도'에 표시된 곳의 제설함에 염화칼슘을 막 채워 넣고 있을 때, 어디서 언제 나타났는지 모르겠을 우리 동의 ‘통장’한 명이 민구에게 인사를 건넸다. 평소 사무실에 자주 출몰해서 이런저런 민원을 던져놓고 가는 통장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통장님.”
-“네…. 그러잖아도 왜 염화칼슘 안 채워주나 했는데, 드디어 하시네요.”
“아, 네에..”
드. 디. 어. 라니. 지금이 무슨 한겨울인가. 이제 막 11월에 진입한 완연한 가을이라고.
-“근데 이 화단은 어떻게 하실 건지.”
“화단이요?”
-“꽃이 얼 것 같아서 제가 버리는 옷가지를 씌워줬던 거거든요.”
“아, 네에...”
가을이 시작될 무렵. 한 철 예쁘라고 골목 구석에 심은 국화였다. 곧 지고 말 꽃인데, 별걱정을 다 한다.
“아, 어차피 겨울에 다 지고 말거라.”
-“올해 10월이 좀 추워서 제가 이렇게 덮어 놨더니 아직 살아 있는 거라서요. 동사무소에서 좀 신경을 써주면 더 오래 예쁘게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동안 쓰레기도 좀 덜 버릴 테고요. 주무관님.”
“아, 네에..”
AI가 말하는 것 같이 감정이 하나도 실리지 않은 딱딱한 말투였다. 경상도 사투리를 꾹꾹 눌러 표준어처럼 말하려고 해서인지 말투와 억양에 큰 변화 없이 일정한, 마치 로봇이 말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간혹 섞여 나오는 경상도식 단어에 고향이 그쪽이 아닐까 짐작 정도만 할 수 있었고, 그 어떤 감정도 유추해 낼 수 없는. 그런 이상한 말투라고 해야 할까.
본인이 이렇게 신경을 써서 꽃이 그나마 살아 있는 건데, 동사무소에서는 심어만 놓고 왜 신경을 안 쓰냐는 약간의 신경질이 느껴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민구가 처음 발령을 받아 왔을 때였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의 사소한 것을 가지고,공무원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
‘인수인계가 제대로 안 된 건가요? 주무관님!’
이라는 말을 날려 기분을 상하게 했었던, 그때의 말투와 꼭 같았다.
“통장님 이것까지 신경 쓸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돌아가서 팀장님께 한 번 상의는 해볼게요.”
민구가 보기엔 통장이 특별히 신경을 써 화단을 덮어 줬다는 담요 때문에 주변에 쓰레기가 더 모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통장님 오지랖 때문에 오히려 쓰레기가 쌓이네요.’라고 말이다.
-“예에... 연락 좀 부탁드려요.”
“네에..”
-“아, 그리고 주무관님. 또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급히 자리를 뜨려고 하는 민구의 등에 대고 꼭 같은 말투로 또 민구를 불러 세웠다. 땀을 뻘뻘 흘리며 염화칼슘을 나르느라 파김치가 된 민구의 몰골은 본 건지 만 건지. 통장은 본인 하고 싶은 말은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우리 동네에 좀 어려운 어르신이 한 분 계신 데, 그분이 이가 아파서 죽을 것 같다고 하시거든요.”
“네에...”
-“그분을 좀 도와드리고 싶은데, 주무관님.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민구는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통장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통장 한두 해 하는 것도 아니고. 전혀 상관없는 민구를 불러 세워놓고 할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11월에 땀이 범벅이 되어 염화칼슘을 채워 넣고 있는 민구에게 고생한다며 음료수라도 하나 가져다줘야 하는 거 아닌가.
인수인계 타령하며 업무를 따지고 들 때는 언제고, 필요할 때에는 담당자 상관없이 자기 말만 늘어놓는다. 인수인계도 제대로 안 한 채 맨땅에 헤딩으로 일하는 공무원이나, 그런 공무원을 만날 탓하며 또 본인들 필요한 얘기만 늘어놓는 통장이나 이상한 건 매한가지다.
“통장님. 그건, 복지팀과 얘기하셔야 하는데요, 제가 사무실에 들어가서 복지팀장님께 말씀드려서 연락 한 번 드리라고 할게요.”
-“아. 네. 그. 러. 시. 겠. 죠..."
그. 러. 시. 겠. 죠....???? 는 뭐야.
“네. 뭐 또 있으세요?”
-“아뇨. 뭐... 그럼 부탁 좀 드립니다.”
“네, 그럼 저는 아직 할 게 좀 남아서요.”
-“네. 주무관님.”
“들어가세요. 통장님.”
말을 더 섞다가는 동네의 갖은 민원을 다 민구에게 말할 것만 같아, 민구는 급히 통장의 말을 자르고 염화칼슘 채워 넣는 일을 마무리하러 성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통장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한참동안 멀어져가는 민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정확히 2시간 30분 후에 일어날 일을 그 누가 예상이나 할 수 있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