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통장
앞자리가 3이 되었다.
아이는 앞자리가 3일 때부터 재수를 시작했고
선행반에 다녔다.
재수이긴 한데 정시를 안 해 본 재수라서 ‘정시’를 메인으로 달리는 재수가 낯설다.
수시는 수능 후 논술과 면접으로 모두 지원했다.
수능을 잘 보면 수시 논술과 면접엔 가지 않을 테니까.
인생은 각자가 담당할 그릇을 안긴다.
내가 좋든 싫든 나에게 주어진 그릇의 음식을 먹어야 한다.
안 먹으면 음식이 상해서 벌레들이 모여들 것이다.
당장 먹지 않더라도 내 몫의 그릇은 내 책임이다.
요즘 나는 미뤄두었던 음식들을 꾸역꾸역 먹는 중이다.
언젠가는 먹어야 하는 거라서 이번 기회에 먹으면 되긴 하는데 예상치 못했던 재수 학원비까지 얹혀서 체할 지경이다.
부디 무사히 지나가기만을 간절히 기도하며 재수학원비라는 음식을 꾸역꾸역 처리 중이다.
그동안은 감사하게도 돈이 무섭지 않을 정도로 벌고 쓰며 살았는데 재수비용이 매달 200만 원 넘게 나오니까 소화가 참 어렵다. 일개 월급쟁이인 나에겐 참 버거운 비용이다.
아이의 재수가 무사히 끝나길 기도하며 나의 빚통장도 무사히 갚게 되길 소망한다.
최소한의 비용만 쓰려고 가계부도 쓰는데 그래도 역부족이라서 얼마 안 되던 주식도 다 팔고 적금 통장도 깨고 개인연금도 해지했다.
이젠 남은 재수 비용을 갚기 위해서 보험을 하나씩 해지하는 중이다.
마지막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잘 마무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중이다.
재수는 현실이다. 꿈만 꾼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의지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재수종합반을 성실히 다니는 아이에게 엄마가 부담이 되니까 독학하라고 말하기엔 입이 안 떨어진다.
매일매일 성실하게 300일을 하루처럼 살아가는 아이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을 하려니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크게 바라는 게 없어서였는지 부모님 덕에 어학연수도 다녀와서 그 덕을 보고 영어학원에서 알바도 하며 대학원에도 다녀서인지 돈 때문에 이렇게 전전긍긍하는 건 정말 처음이다.
매달 나가야 할 고정비를 최대한 줄이고자 노력했으나 마지막 학원비를 내고 영끌 재수의 면모가 드러나고 있다.
22살 이후로 부모님 도움도 안 받고 아르바이트하며 스스로 용돈을 벌었는데 그때도 생활비는 안 들었으니 나 하나만 챙기면 됐으니 문제가 없었다는 걸 감사하다는 생각을 한다.
자녀가 무언가에 전념하고 배우고 준비할 수 있도록 부모가 든든한 지지대 역할을 해주는 게 자녀 입장에는 얼마나
큰 힘이 되는 건지 아이를 뒷바라지하며 뼈저리게 느꼈다.
이럴 때면 본인보다 늘 가족을 챙기고 자녀들을 뒷바라지하느라 밤낮없이 일하던 엄마 생각에 마음이 먹먹해진다.
재수하느라 피부도 안 좋아지고 설사를 달고 사는 아이도 안쓰럽다.
우리 인생에 대학이 뭐길래 온 식구가 함께 어려움을 겪는 건지 모르겠지만 희망을 가지고 아이의 미래를 끝까지 응원한다.
이번 기회에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는 연습을 해본 아이는 앞으로도 노력하고 나아가는 지난한 인생길을 잘 버티며 살아갈 거라고 믿는다.
좋은 밑거름이 되는 날들이 되기를 바란다.
나도 이번 기회에 돈 관리를 좀 더 체계적으로 하는 훈련을 하게 된 기회라고 생각하련다. 빚통장이 잘 해결되길 바라며. 역시 경제 공부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이들에게는 미리미리 경제 교육을 해 주고 예산과 지출 그리고 불시에 닥칠 일을 대비할 비상금에 대해서도 준비가 필요하다고 알려줄 생각이다.
경제 규모가 나 하나일 땐 잘 관리했는데 아이들 학원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예산과 지출이 계획적으로 되지 않았고 몇 년이 쌓이면서 빚통장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ㅠㅠ
잘 갚고 맘 편히 살아보자.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곧 정리되리라 믿는다.
추신. 가능하면 마이너스 통장은 만들지 마세요. 그때부터 내 돈 아닌 돈을 내 돈처럼 쓰다가 예상치 못한 지출이 더해져 빚통장을 감당하기가 버거워진답니다.
#재수생엄마일기 #빚 #마이너스통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