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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화일 Mar 13. 2024

예상할 수 있는 것과 예상할 수 없는 것

예측불허의 런던 생활

전통과 역사가 박제된 나라, 몇 년 전에 방문한 거리가 그대로 남아 있고 좁고 웃풍이 드는 집을 고집스럽게 유지하는 런던은 변화가 드문 나라 중 하나다.

물론 코로나를 겪으며 많은 것이 순식간에 바뀌었음에도 그들의 현상 유지 사랑은 어쩔 수가 없다.


한때 세계를 재패했던 제국주의의 주체로서 영국인들에게는 과거를 계속해서 곱씹는 게 현재를 이리저리 바꾸는 것보다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19세기보다 더 올라갈 곳이 남이 있지 않은 이상 변화가 불안할 수도 있지 않을까.


전통을 유지하는 습관은 영국인들의 실생활에도 잘 녹아 있다.

매년 명절에는 다락에서 똑같은 장식을 꺼내 전년과 똑같이 집을 꾸미고 매일 똑같은 옷을 서슴없이 입으며 매번 똑같은 메뉴를 점심으로 먹는 모습이 흔하게 보인다. 변화는 대부분 일상에 약간의 변주만 주는 식이다.


이처럼 변화가 없다 보니 늘 똑같은 시스템이 다소 뻔해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 런던 살이는 예측불허 그 자체였다.


한달이 멀다 하고 찾아오는 기차 파업은 당연한 일이고 새로 와이파이를 설치하는 데 세 달이 걸리기도 한다. 5분 후에 온다던 버스는 30분을 기다려도 오지 않고 튜브는 잘 가다 갑자기 종착역을 바꾸며 내릴 사람은 곧 내리라는 안내 방송을 내보낸다.

그러고 보니 생활과 밀접한 교통에 관한 것들이 많은 것 같지만 관광 명소에서도 재밌는 상황이 일어난다. 갑자기 박물관의 특정 전시실이 닫혀 관람을 포기해야 한다거나 갤러리를 구경하는 관람객 옆에서 뜬금없이 관리자들이 그림을 들고 왔다 갔다 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는 식이다.



이러한 삶의 방식에 섞여 생활하자니 마음은 편하지만 몸은 정말 불편할 때가 많다. 적응 초반 말도 안 되는 상황에 화를 내는 친구들도 많았고 한국에 돌아갈 날만 기다리는 지인들도 있었다.

현실 도피 목적으로 영국에 와 버린 나는 머릿속 여유를 위해 몸을 번거롭게 하는 데 기꺼이 동참했지만 아직도 정말로 헛웃음이 나오는 상황이 종종 생기곤 한다. 특히나 낡고 쓸모없는 것조차 바꾸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우물 안 개구리가 떠오를 때도 많다.


쥐가 고양이 생각해 주는 격이지만 가끔 영국의 이런 답답함이 아주 가끔 안쓰러울 때도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호시절을 그리며 과거에 멈춰버린 사람을 보는 느낌.



그러던 중에 최근에 그들의 마음을 조금 이해하게 된 일들이 생겼다.


한식이 슬슬 유행을 시작하더니 한류가 눈에 띄게 퍼지면서


'너 한국인이야?'

'서울에서 왔어? 쿨하다.'

'한국말 더 해 주면 안돼?'


식의 말을 종종 듣는다.


한국과 관련된 것 자체를 트로피처럼 대상화하는 경우가 많아 그저 기분 좋은 일만은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말만 해도 발음이 듣기 좋다며 칭찬을 듣는 영국인의 심정이 이랬을까 싶다.

런던에서 '나 한국에서 왔어.'라고 할 때마다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 '오, 남한이야 북한이야?' 였던 걸 생각하면 짧은 시간에 많은 게 변했다.


나의 국적 자체로 누군가의 호감을 사는 일을 몇 번 겪고 나니 이 나라의 배부른 정체가 더 얄미우면서도 부러워지기도 한다. 어딜 가도 우리 것이 최고였던 순간이 있었고 그래서인지 다른 이에게 인정받을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굳이 먼저 비교를 할 이유도 없다.


당연히 우리 것이 좋은 것일 거라 여기고 그게 아니라면 놀라워 하는 그들의 인식이 새로웠다.

게다가 지난 영광을 좇으며 과거에 머무르려 하는 현상이 오히려 전 세계적으로 관람객을 불러 모으고 있으니 영국이 뻔하고 불편한 삶을 마땅히 감수하는 건 어떻게 보면 가장 합리적인 결정 같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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