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몰든
최근에는 소호나 런던 중심가에서도 한식당이나 한국 마트를 자주 볼 수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식 재료를 사러 간다면 대표적인 곳이 있었다.
기차역에서 내리자마자 하이스트릿을 가운데 둔 채 서로 나란히 마주보며 즐비해 있는 한식당, 한국식 카페, 한국 미용실까지. 어딘가 응팔에서 본 쌍문동의 느낌이 은은하게 나는 런던 속 작은 한국, 뉴몰든이다.
원래 다른 이민자들이 주를 이루다 차츰차츰 한국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는 뉴몰든은 2002년 월드컵 때 뉴몰든 한인타운 붉은 악마 응원이 BBC에 소개될 만큼 대표적인 한인들의 중심지였다.
동네도 나이를 먹어가며 지금은 예전만큼의 화력을 보여주지 못해 아쉬움이 남지만 지금도 하이스트릿을 걷고 있으면 여전히 연령과 관계없이 로컬(?) 한국인이 자주 눈에 띈다. 방을 세 놓는 한인 집주인이 많아 워홀로 온 젊은이들이 상대적으로 쉽게 영국 생활을 시작하는 곳이기도 하다.
간혹 이곳에서 오래 한식당을 하며 버텨온 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다.
밤낮 주말 할 것 없이 열심히 살아온 그들의 인생은 모든 것을 등지고 떠나 새로운 곳에서 정착한 이들의 절박함과 단단함으로 차 있지만 한편으로는 말 한 마디 안 통하던 곳에서 결국 살아낸 자부심이 담겨 있기도 하다.
얼마 전 패스트 라이브즈라는 영화를 봤다.
이민자 출신의 이민자의 이야기. 이민자의 정체성 혼란과 그 주변인의 갈등이 훌륭하게 묘사되었고 평이 좋았던 이유도 알 것 같았지만 그보다 강하게 느낀 건 영화 전반에 걸쳐 묻어나는 내가 선택한 삶이 더 나은 것일게 분명하다는 감독의 자기위로였다.
주인공이자 이민자인 나영에게 한국은 한때 가질 수도 있었지만 이젠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첫사랑인 해성으로 나타난다. 그리던만큼 환상적인 모습을 한 해성은 '전형적인 한국 남자야.' 라는 나영의 대사에서 대변되듯 알면 알수록 나영의 가족이 한국을 등졌던 요소를 복기시키는 존재다.
결국 해성은 나영이 가질 수 없는 게 아니라 가져봤자 좋을 게 없는 첫사랑이다.
감독은 지금의 한국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구시대적인 문화와 인식을 고스란히 들고 와 내보이며 이게 바로 내가 여기 남는 이유라고 합리화한다.
처음에는 다소 게으른 구성이 아닌가 했는데 곱씹을수록 여기 산지 오래된 몇몇 이민자들이 떠올랐다. 굳이 한국인뿐만 아니라 고국을 떠나온지 너무 오래된 이민자들은 새로운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느라 고국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거나 알고 있더라도 애써 일궈온 삶의 보상심리로 모른 척하기도 한다.
그들 나름의 사정, 타고난 주류로서의 삶을 버리고 소수로서의 힘겨운 삶을 일궈낸 그들에게는 당신들의 삶이 더 좋은 삶이란 식의 자기위로가 선택이 아닌 필수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이 영화가 큰 위로를 주고 많은 지지를 받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가끔씩 매년 한국의 복지를 누리러 가면서도 한국에선 이런 것 못 누리지 않냐 묻는 이의 질문이 얄밉지만은 않은 이유 중 하나다.
최근에는 런던 어디서든 한식이나 한식 식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김밥이 그리우면 찾는 뉴몰든에는 어딘가 풍기는 복고 냄새와 웬만한 건 다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 한국식 외국 음식까지 찾을 수 있는 이 동네에 발걸음을 뜸해질망정 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