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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환희 Apr 04. 2022

12. ⟨구미호⟩와 ⟨설녀⟩의 같음과 다름 1

현실적인 삶과 몽환적인 삶

헌의 ⟨설녀⟩나 임충의 ⟨구미호⟩는 한 개인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는 아니다. 두 작가의 이야기는 다양한 국가의 설화와 문학 작품에서 빌린 모티프들을 융합해서 만든 이야기이다. 라프카디오 헌을 연구한 나바에 히토미(難波江 仁美)는 헌의 ⟨설녀⟩를 합성사진(composite photograph)에 비유할 수 있는 합성 이야기(composite story)라고 말한다[1]. ‘합성 이야기’라고 말한 것은 헌이 국가 간의 경계를 초월해서 다양한 설화와 문학 작품으로부터 모티프들을 가져와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헌의 ⟨설녀⟩에는 일본의 전통 설화 (⟨설녀⟩와 ⟨학 아내⟩), 견우직녀담, 중국의 ⟨동영과 직녀⟩, 보들레르의 산문시, 스칸디나비아의 ⟨악몽⟩ 전설, 폴리네시아와 에스키모의 이류교혼담에서 차용한 모티프들이 혼재되어 있다.


임충의 ⟨구미호⟩는 한국과 일본의 다양한 설화와 영화에서 끌어온 모티프로 구성된 작품이다. ⟨여우구슬⟩ ⟨구미호⟩ ⟨지네 각시⟩ 따위의 한국 설화, 헌의 ⟨설녀⟩와 일본 설화 ⟨학 아내⟩,  영화 ⟨설녀⟩와 연극 ⟨유즈루⟩ 따위에서 유사 모티프를 발견할 수 있다. 어쩌면 임충은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설화나 인접 장르로부터 영감을 받았을는지 모른다. 포송령의 ⟪요재지이⟫에 수록된 수많은 ‘여우 아내’ 설화, 1969년 8월부터 1970년 2월까지 방영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한일합작 애니메이션 ⟪요괴인간⟫에서 영감을 얻었을 수도 있다.


 임충의 ⟨구미호⟩가 저본으로 삼았을 만한 전통 설화를 찾다 보면, 헌의 ⟨설녀⟩에 이르게 된다. 인간계에 속하는 남자와 이계(異界)에 속하는 여자의 잘못된 만남, 금기 부여, 결혼, 금기 파기, 이별 따위의 모티프들이 공통으로 들어 있다. 두 작가의 작품이 옛이야기임에도 전통 설화로 인식된 것은, 구미호나 설녀가 전통 설화 문학에 존재하는 인물이고, 서사가 전통적인 이류교혼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헌은 공포미를 지닌 설녀라는 캐릭터에다 이류교혼담의 서사를 결합하였다. 소기법사가 어느 새벽 스쳐 지나가듯이 만난 눈의 정령은 환상적인 그림 속의 여인이나 다름없지만, 헌의 손길을 거쳐 희로애락의 감정을 지닌 살아있는 인물로 변화되었다. 팜므 파탈과 무서운 식인귀의 이미지를 동시에 지닌 구미호라는 인물은 임충의 손길을 거쳐서 가난한 삶과 남편의 폭력에 신음하는 박해받는 아내가 되었다.


⟨전설의 고향: 구미호⟩에 미친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단편 영화 ⟨설녀⟩의 영향도 무시하기는 어렵다. ⟨전설의 고향: 구미호⟩의 대단원에서 구미호는 아이들을 재우고 등잔불 아래에서 바느질한다. 그런 아내에게 칠복이는 사랑이 가득한 눈길을 보내며 자신이 만든 나막신을 신어보라고 내어놓는다. 남편은 아내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예전에 구미호를 만났던 사건을 떠올리고 금언 금기에 관해 이야기한다. 금기를 파기한 남편에게 분노를 느낀 아내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남편을 질책한 후에 사라진다. 맨 마지막 장면에서 남편은 사라진 아내에게 자신이 만든 나막신을 주려고 오두막 밖으로 뛰쳐나간다. 이 장면은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영화에서도 거의 유사하게 펼쳐진다. 특히 신발 모티프는 라프카디오 헌의 ⟨설녀⟩에는 들어 있지 않은 것으로서, 오로지 고바야시의 영화 ⟨설녀⟩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설녀⟩와 ⟨구미호⟩의 대단원에 등장하는, 남편이 아내에게 신발을 주는 장면

이러한 영향 관계를 엿볼 수는 있지만, 한국 드라마 ⟨전설의 고향: 구미호⟩는 고바야시 감독의 일본 영화 ⟨설녀⟩와는 차별화할 수 있는 여러 특징을 지녔다. 고바야시의 ⟨설녀⟩는 절제의 미학이 돋보이는 산문시와 같은 영화이다. 상징적인 이미지가 풍부해서 다의적인 해석이 가능하고 서늘한 공포감과 애잔한 슬픔을 느낄 수 있는 매력적인 영화이다. 하지만 줄거리가 단순하고 분위기가 정적(靜的)이다. 공포감과 긴장감을 불러일으키지만, 역동성과 현실성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헌의 ⟨설녀⟩나 고바야시 감독의 ⟨설녀⟩는 모두 결혼한 이후에 벌어진 사건들을 간단하게 ‘생략’과 ‘요약’의 방식으로 처리한다. 설녀는 아이들을 열 명이나 낳을 정도로 긴 세월을 미노키치와 함께 살았지만, 시어머니의 죽음 이외에는 특별히 언급할 만한 그 어떤 사건도 없는 평화로운 삶을 산다. 또한 ‘설녀’는 시골 사람들이 자신들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영원히 변치 않는 비현실적인 젊음과 아름다움을 지녔다.


반면에, 1979년과 1997년에 방영된 ⟨전설의 고향: 구미호⟩는 여러 사건들로 짜여져 있어서 서사가 다채롭고 역동적이다. 해산한 아내에게 미역국도 끓여줄 수 없는 가난한 남편의 슬픔, 착한 남편을 위한 구미호의 구슬 훔치기, 재물로 인한 시어머니와 칠복이의 타락, 칠복이의 도박과 아내 학대, 남의 무덤을 파헤쳐서 구슬을 훔치는 구미호를 사냥하는 무사, 구미호 아내의 부상, 남편의 참회 등등 다채로운 사건이 일어난다. 임충이 창작한 ⟨구미호⟩가 오래전부터 전승된 옛이야기로 대중의 마음에 각인될 수 있었던 것은 재물욕이 변화시킨 남편의 모습, 무능한 남편을 위해서 자신의 고혈을 짜내는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아내의 고통, 자식에 대한 구미호의 사랑 등이 이 땅을 살아온 전통적인 아내와 어머니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계에서 온갖 고초를 치뤘던 ‘구미호 아내’는 헌과 고바야시 감독이 표현한, 영원한 젊음을 지닌 ‘설녀’와는 다른 삶을 살았던 여인이이다.


⟨전설의 고향: 구미호⟩를 구성하는 ‘재물에 눈이 어두워진 인간 남편의 변모와 이류 아내의 고통’이란 모티프는 ⟨설녀⟩에는 들어 있지 않다. 이 모티프를 임충이 ⟨구미호⟩에 넣은 것은 자신이 주변에서 보아온 한국 여성들의 삶을 반영하고 싶어서 일 수도 있고, 일본의 또 다른 대표 이류교혼담인 ⟨학 아내⟩나 연극 ⟪유즈루⟫(夕鶴)에서 차용한 것일 수도 있다.[2]  ⟨학 아내⟩를 재화한 기노시타 준지(木下順二)의 연극 ⟪유즈루⟫에 등장하는 남편 요효는 처음에는 순박한 인물이었지만 아내 쓰우가 학 깃털로 짠 옷감이 비싼 값으로 팔리자 점차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남편으로 변한다.  ⟨전설의 고향: 구미호⟩에 삽입된, ‘남편의 재물욕으로 고통받는 아내’라는 모티프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지 잘라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모티프는 임충의 ⟨구미호⟩와 헌의 ⟨설녀⟩를 구분짓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1] Nabae Hitomi, The spirit of no place : reportage, translation and re-told stories in Lafcadio Hearn, Kobe City University of Foreign Studies,

[2] 미요시 주로 외 지음, 박영산 옮김, ⟪일본현대희곡선⟫, 소화 2005, 56-97면.



송윤아가 구미호로 출연하고, 임충이 대본을 쓴 1997년 판 ⟨전설의 고향: 구미호⟩가 최근에 다시 동영상이 유튜브에 업로드 되었다.


https://youtu.be/nRSki4GtHr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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