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환희 Apr 11. 2022

14. 옛이야기 다시 쓰기와 새로 쓰기의 경계

옛이야기에 관한 강의를 할 때, 많은 작가는 내게 “다양한 옛이야기에서 이런저런 모티프를 끌어오고 결말도 좀 바꾸었는데 혹시 자신이 옛이야기를 훼손한 것은 아닌지 두렵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나는 작가들에게 옛이야기 어린이책을 쓰는 목적이 무엇인지 묻는다. 작가의 목적이 ‘전통 설화에 담긴 우리 옛사람들의 삶, 꿈, 지혜 따위를 아이들에게 잘 전해주는 데 있는지’ 아니면 ‘전통 설화부터 다양한 모티프를 끌어와서 어린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환상적 이야기를 새롭게 창작하는 데 있는지’ 물어본다. 작가의 목적이 우리 옛사람들의 목소리를 아이들에게 잘 들려주는 데 있다면, 채록 자료를 풍부하게 수집하고 꼼꼼하게 분석해서 옛것의 매력과 가치를 잘 살려야 한다. 하지만, 작가의 목적이 옛것보다 더 나은 새것을 창출하는 데 있다면, 국내와 외국의 설화와 동화에서 다양한 모티프와 상징을 끌어오고 서사를 재구성하는 데 제약을 둘 필요는 없다. 


⟪옛이야기 들려주기⟫(보리, 1995)란 책에서, 서정오는 입말로 전승된 이야기를 글로 적을 때 본래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지는 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받아 쓰기’ ‘떠올려 쓰기’ ‘다시 쓰기’ ‘고쳐 쓰기’ ‘새로 쓰기’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서정오의 구분법에 따르면, ‘받아 쓰기’는 “이야기하는 사람의 말을 그대로 받아 적은 것”이고, ‘떠올려 쓰기’는 “들은 이야기를 머리 속에 떠올려서 글로 나타낸 것”이고, ‘다시 쓰기’는 “이야기를 듣고 말투나 곁가지를 조금 손질해서 글로 쓴 것”이다. 또한, ‘고쳐 쓰기’는 “줄거리를 군데군데 고쳐서 쓴 것”으로서 본래의 이야기와 같은 유형으로 보기 어려운 것’이고, ‘새로 쓰기’는 “이야깃거리나 분위기만 빌어서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으로 정의한다 (52~53면). 구전 설화를 동화화 또는 현대화하려는 작가들에게 중요한 글쓰기 방식은 ‘다시 쓰기,’ ‘고쳐 쓰기,’ ‘새로 쓰기’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를 가르는 기준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그림 형제와 한스 크리스천 안데르센을 예로 들어 보면,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그림 형제는 독일 민중이 입말로 전한 전통 설화를 ‘다시 쓴’ 작가로, 안데르센은 다양한 설화를 ‘새로 쓴’ 작가로 인식된다. 하지만 그림 형제의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메르헨⟫에 수록된 이야기 가운데 상당수는 ‘다시 쓰기’의 범주에 넣기 어려운 이야기들이다. 예를 들자면, ⟨백설 공주⟩를 구성하는 여러 모티프와 서사는 유럽의 다양한 설화에서 끌어온 것이지만, 그 저본이 된 설화가 따로 있지 않다. ⟨백설 공주⟩는 ‘새로 쓴’ 이야기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정도로 그림 형제의 창작력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마찬가지로, 창작옛이야기를 많이 쓴 안데르센의 모든 이야기가 ‘새로 쓴’ 이야기인 것은 아니다. ⟨벌거벗은 임금님⟩은 14세기 스페인 작가 돈 후안 마누엘의 ⟪루카노르 백작⟫에 실린 단편을 저본으로 삼은 이야기이다. ‘다시 쓰기’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안데르센과 그림 형제의 옛이야기가 지닌 차이점은 ‘편집 범위의 크기’가 아니라 작가의 글쓰기 목적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림 형제의 목적은 독일 민중이 남긴 설화의 매력과 가치를 후손에게 잘 전달하는 데 있었지만, 안데르센의 목적은 환상성과 문학성이 뛰어난 새로운 옛이야기를 짓는 데 있었다. 그림 형제는 참다운 독일 민중의 이야기를 찾으려고 애썼지만, 안데르센은 처음부터 동서양의 다양한 설화문학에서 모티프를 끌어오는 데 걸림이 없었다. 그림 형제가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메르헨⟫ 초판본에 들어 있던 ⟨푸른수염⟩과 ⟨장화 신은 고양이⟩를 나중에 선집에서 제외한 것은 그 이야기가 독일 구전 설화가 아니라 프랑스 작가 샤를 페로의 요정담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림 형제와는 달리, 안데르센은 첫 번째 이야기인 ⟨부싯돌⟩를 쓸 때, ⟨알라딘과 이상한 램프⟩에서 차용한 모티프를 거리낌 없이 활용하였다. ⟨인어 공주⟩에는 프랑스계 독일인 라 모트 푸케의 ⟪운디네⟫, ⟪천일야화⟫, 덴마크 인어 전설 따위에서 끌어온 모티프들이 다양하게 섞여 있다. 안데르센의 글쓰기 목적은 덴마크 설화의 매력과 가치를 후손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옛것보다 더 나은 새것을 창조하는 데 있었다. 


독자가 ‘다시 쓰기’를 한 작가와 ‘새로 쓰기’를 한 작가에게 거는 기대치 역시 같지 않다. 그림 형제의 메르헨을 읽을 때 독자는 독일이나 유럽의 민중들이 전승한 옛이야기를 읽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안데르센이나 오스카 와일드의 요정담을 읽을 때 독자는 덴마크나 아일랜드의 전통 설화가 아니라 한 작가의 개인적 상상력이 빚어낸 창작옛이야기를 읽는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작가가 전통 설화의 모양새를 지닌 창작옛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으면서, 그 창작 및 개작 양상을 제대로 말하지 않는다면, 독자는 창작옛이야기를 전통 설화로 잘못 받아들인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임충의 ⟨전설의 고향: 구미호⟩와 리프카디오 헌의 ⟨설녀⟩가 아닐까 싶다. 임충과 라프카디오 헌은 창작 및 개작 양상을 밝히기는커녕, 도리어 그 사실을 은폐하였다. 임충이 쓴 ⟨전설의 고향: 구미호⟩ 대본을 보면 맨 끝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그러고 보면 우리네 전설 속에 살아있는 구미호라는 천년 묵은 여우는 언약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기 위해 만들어진 상상 속의 동물일지(?) 분명하게 못된 인간들이 있는 한 구미호에 대한 전설도 오래도록 남아있을 것입니다.” 임충은⟨전설의 고향: 구미호⟩가 우리 옛사람들이 남겨준 전설이라고 말한 것이다. 라프카디오 헌은 ⟪괴담⟫의 ⟨작가 서문⟩에서 “‘설녀’라는 기담은, 서타마 군의 조후촌의 어느 농민이 그 고향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필자에게 들려준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가 일본의 책에 이미 쓰여진 내용인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이상한 신앙은 일본 각지에 변형된 여러 형태로 상존해 온 것도 사실이리라.”라고 말한다.[1]  


그런데, 임충의 ⟨구미호⟩나 헌의 ⟨설녀⟩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한국과 일본에서 옛사람들이 전승한 전설과 매우 다르다. ⟨전설의 고향: 구미호⟩와 ⟨설녀⟩의 원전을 추적한 학자들의 연구가 없었다면, 아마도 많은 독자는 이 두 이야기를 옛사람들이 전해준 전설로 잘못 받아들였을 것이다. 또한, ⟨1997년 납량특집 전설의 고향: 구미호⟩를 둘러싼 표절 논쟁은 창작성이 은폐된 새로 쓰기의 위험성을 잘 말해준다. 임충 작가나 제작진이 ⟨전설의 고향: 구미호⟩가 옛사람들이 전승한 전설이 아니라 새롭게 창작한 전설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명시하였다면, ⟪구미호: 여우누이뎐⟫의 작가들도 표절의 위험성을 보다 잘 깨달을 수 있었을 게다. ⟪전설의 고향: 구미호⟫도 ⟪설녀⟫에서 여러 모티프를 빌린 사실을 고려할 때, 임충 작가가 전승 문학에서 영감을 얻은 드라마 작가들이 안고 있는 어려움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느껴진다. ⟪구미호: 여우누이뎐⟫를 쓴 작가들이 표절로 자격정지 처분을 받은 이후, 옛이야기에 대한 관심과 상상력이 위축되었는지, 더는 설화나 전설에서 모티프를 끌어온 판타지나 공포물을 쓰지 않게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1] 백낙승‧황소연 옮김, ⟪서양인이 반한 신기한 동양 이야기⟫, 강원대학교출판부 2009, 4면.

이전 13화 13. ⟨구미호⟩와 ⟨설녀⟩의 같음과 다름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