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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는 자수성가했다. 2

by 이순직 Jul 08. 2023

이 모양으로 회사에 다니다간 제명에 죽기는 틀려먹었어…. 푸념을 늘어놓았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옛말도 있는데, 깡그리 무시당하면서 도플갱어라며 따가운 눈총까지 받아야 하니, 사무실 공기가 숨 막힐 지경이었다.


얼굴 생김새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지 않은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닮은꼴 팀장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는데, 억울할 따름이었다.


황이 직장 상사인 나에게 도플갱어라고 새삼스럽게 놀라는 척 놀리는 짓거리도 닮은꼴 팀장과 이심전심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팀장이 낙하산으로 꽂히기 전에 황은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면 으레 내 눈치 보기에 바빴다. 지 살자고 권력에 민감하게 굴종하는 행동을, 사회생활 잘한다고 비아냥거리는 것도 내 심성에 거슬렸다.


*


"아직 퇴근하지 않았어요?"


문이 열리고 경비가 별일이다, 싶은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아닙니다. 곧 퇴근합니다."


책상 가득 펼쳐놓은 서류들을 서둘러 긁어모았다. 정시에 퇴근하지 않으면 매사에 까탈스러운 본부장 귀에 들어갈 터이고, 심할 경우 시말서까지 써내야 했다. 똥오줌 못 가리고 오락가락하는 게 회사 정책이니, 유별났다.


정시 퇴근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정책이었다. 팀장이 그 사실을 모를 리도 없는데, 나를 다그치는 이유는 간단했다. 나를 장기판의 말로 삼아, 본부장과 팀장의 힘겨루기. 물론 짐작이지만.


낙하산 출신이라는 신입의 말이 사실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등 뒤에 무슨 든든한 배경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한자리 꿰차고 있는 놈들이 더 높은 자리를 위해 저희끼리 치고받으며, 진흙탕 쌈박질하든 말든 관심 없었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보고서를 작성해서 내일 아침 팀장 책상 위에 올려놓아야 했다. 사실, 일의 능률을 위해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나, 반대로 야근을 불사해야 한다는 얘기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논란만큼 부질없었다. 도긴개긴이었다.


"살짝 늦었지만, 정시 퇴근입니다."


*


본부장 귀에 들어갈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리지 말라고 조심스럽게 부탁하고 나니, 뒤늦게 초라한 기분에 휩싸였다. 신입처럼 사표를 던지는 용기는 있지만, 뒷감당할 환경도 조건도 없었다. 지방대를 차별하는 행태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고, 게다가 나는 <문송합니다>가 아닌가.


창사 60주년을 맞아, 미국에 출장 중인 회장이 사내 곳곳에 기념사를 대자보로 내걸었을 때, 읽다가 웃음이 터져 나와 참느라 곤욕을 치렀다.


"읽기 싫으면, 그냥 가요."


황은 애사심에 상처 입었다는 투로 눈까지 흘겨가며 핀잔했다. 자리에 그녀만 있었다면 맞춤법과 사용법이 틀렸다고 손가락으로 짚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 주임만 아니라 다른 부서 사람들도 있어, 입술 사이로 삐죽삐죽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억지 참았다.


<부친께서 창업 이후 본사의 발전을 위해 고군분투하신 것을 생각하면 회환이 밀려옵니다.>


걸핏하면 근엄한 표정을 짓는 회장 늙은이의 얼굴 안쪽에서 불타는 탐욕이 도사리고 있지 않을까. 확신이 들었다. <회환>은 실수라고 쳐도 부친이라니! 세상에 어떤 자식이 자신의 아버지를 부친이라고 하던가. 홍길동처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으니 부친이라 했나? 공대 출신인 회장의 머릿속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사뭇 경건한 표정으로 기념사를 훑어보는 박 주임과 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타 부서 사람들 역시 얼굴에서 존경심이 뚝뚝 떨어졌다. 자신의 값싼 욕망에 갇혀 회장 늙은이의 게걸스러운 탐욕을 보지 못했다.


경비에게 내쫓겨 사무실을 나왔다. 서류 가방을 어깨에 메고 야근을 위해 집으로 가는 길 위에, 내 눈에만 보이는 어둠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


"베트남 보고섭니다."


"거기 두세요."


아침까지 작성해서 책상 위에 올려놓으라고 윽박지르던 성난 얼굴과 달리 닮은꼴 팀장은 관심 없다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저성과자라는 비난을 또 듣기 싫어, 내려앉는 눈꺼풀과 싸우며 겨우겨우 작성했는데. 목구멍까지 닮은꼴 팀장에 대한 욕지거리가 올라왔다. 팀장 직함만 아니라면 당장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검토하지 않습니까?"


밤을 하얗게 불태웠다. 머릿속에는 여전히 아라비아 숫자들이 제멋대로 뒤엉켜 있었다. 또 나를 골탕 먹인 거야? 닮은꼴 팀장은 헤죽헤죽 웃으면서 자리로 돌아가라고 사나운 눈짓을 했다. 자신과 엇비슷하게라도 생겼으면 스쳐 지나가는 호감 정도는 가질 만도 하지만,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 났으니, 가정교육이 의심스러웠다.


아무리 부하 직원이라고 해도 그렇지, 사람 대하는 태도가 완전 깡패네. 주먹만 쓰지 않았을 뿐이지, 불독과 뭐가 달라? 회사에서나 부하이지 퇴근하면 서로 월급쟁이에 지나지 않아. 나보다 나이가 많길 하나. 속에서 열불이 치밀어 올라왔다.


"팀장님! 방금 검토를 끝냈어요."


황이 다가와 서류를 팀장에게 내밀었다. 얼핏 보기에도 내가 쓴 보고서와 같은 제목이었다.


"수고했어요."


팀장은 황의 보고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양다리 걸친 거야? 닮은꼴 팀장은 애당초 나쁜 놈이니까 그렇다고 쳐도, 어제 퇴근하면서 엑셀 단축키가 어쩌고 하면서 놀리기까지 하더니, 시치미 뚝 떼고 있었다는 거네? 바로 윗선인 나를 건너뛰고, 팀장과 짬짜미하면서 날 가지고 놀았다는 추측에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요즘 들어 퇴근 후에 만나주지 않고 노골적으로 피한다고, 이렇게까지! 정말 가지가지 하네!


"지금 미팅 가야 하니까, 다들 하던 일 하세요."


팀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을 나갔다. 내가 쓴 보고서는 책상에 을씨년스럽게 내팽개쳐져 있었다. 문득, 기시감이 살아났다. 취준생 시절 쓰레기통으로 수없이 버려졌을 이력서가 떠올라, 마음이 먹먹해졌다.


"뭐야? 이런 식으로 뒤통수치는 거야?"


황에게 벌컥 화를 냈다. 내가 신경질적으로 변했다는 말이, 닮은꼴 팀장의 귀에 들어갈 것을 뻔히 알고 있었지만, 참는 것도 정도가 있었다. 뒤통수가 아니라 보란 듯이 앞통수를 때린 것과 다름없었다.


"팀장님이 말하지 말라고 해서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닮은꼴 팀장보다 나와 같이 일한 시간이 얼만데 귀띔조차 하지 않는 거야? 라고 말하지 못했다. 황은 징글맞게 엷은 웃음을 짓더니 자리로 돌아갔다. 여우야. 백여시야. 그러니 꼬박꼬박 고자질이나 일삼는 밀정 짓거리나 하지. 연애가 사랑이 될 수 없을 수도 있는 거지, 그걸 가지고 앞에서 생글생글 웃으면서 뒤에서 호박씨를 전문적으로 까네.


하기야 권력에 줄 서는 치사한 짓은 유구한 생존본능이지. 그래서 생겨난 게 온갖 연줄이 아니겠어? 지연이니 학연이니 하는 것들. 하다못해 생판 모르는 사람이라도 같은 견종을 키운다는 것만으로도 의기투합할 정도이니, 닮은꼴 팀장에게서 내게는 없는 권력을 확실히 발견했는지도 모르지. 이참에 차라리 잘 됐다며, 고무신 거꾸로 갈아신을 절호의 기회라 여길지도. 그렇다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치사한 복수는 껄끄러워. 오로지 감당해야만 하는 내 몫이라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긴 하지만.


"장대리님. 무슨 생각에 골똘해요?"


옆자리 박 주임이 고개까지 갸우뚱거리며 내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내가 퇴사한 신입과 친하게 지낸다며 걸핏하면 뒷담화를 씨부렁거리던 박 주임이라,


"신경 쓸 거 없어."


퉁명스레 내뱉었다.


"그게 아니라…, 오늘도 혼점 할 겁니까?"


어쭈구리? 급소를 찌르네. 사실 신입이 퇴사한 후로 아무도 나와 같이 점심을 먹으려 하지 않았다. 팀원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우르르 몰려 사무실에서 사라지더니, 구내식당에서 먼저 자리 잡고 먹기 일쑤였다. 뒤늦게 식판을 들고 끼어들기 마뜩잖아,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혼자 점심을 먹었다. 혼자 씹는 밥알은 모래알보다 딱딱했다.


"왜?"


"고민하지 마시고, 같이 가시죠? 점심시간인데."


신입이 입사하기 전에, 사수 노릇을 해서 박 주임과 비교적 가깝게 지낸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웬만큼 업무를 배운 뒤부터는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인사 정도만 했다. 나 역시 업무에 쫓긴 탓도 있지만, 청출어람까지는 아니나, 박 주임은 제법 일머리가 돌아가는 편이었다. 잔재주가 있었다. 그런 와중에 신입이 들어왔고, 털털한 성격이 맞아 자주 어울렸다. 물론 지방대 출신이라는 같은 천민 딱지가 붙어 있었지만.


"혼밥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알고 계시죠?"


식판 들고 자리에 앉자마자 박 주임은 주위를 빠르게 살피면서 말했다.


"뭘?"


"목숨 걸고 선배와 점심 먹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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