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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는 자수성가했다. 5

by 이순직 Jul 11. 2023

불독은 넘겨짚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원장에게 받은 액수를 어떻게 정확히 아는지 확인할 수 없으나, 거침없이 내 주머니를 뒤지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쩌다 주머니에서 동전이라도 나오면 어김없이 명치 끝에 돌주먹을 꽂았다. 고아 새끼가 누굴 속여먹으려고 지랄이야! 윽박지르며.


"억울할 필요 없어. 왠지 알아?"


"아무렇지도 않아. 짝꿍한테 참고서 빌려서, 샀다고 할게."


"얼굴은 왜 똥 씹은 거야?"


"아니야. 정말 난 아무렇지도 않아."


"사는 법을 배웠다고 믿어라. 고아는 하이에나처럼 살아야 한다는 걸, 직접 보여주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몇 년 후에 사회로 나가면. 책만 읽는 놈이 뭘 알겠어? 안 그래? 아무튼, 고맙다!"


보육원을 퇴소하기 보름 전까지 불독의 착취는 계속됐다.     


졸업은 했어도 반년 넘게 직장을 잡지 못했다. 닥치는 대로 알바를 하면서도 하이에나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력서를 쓸 때마다 지방대 출신이라는, 매번 마주치는 참담한 현실을 맞닥뜨리면서도. 생년월일이 의심스럽고, 이름이 수상하고.


무엇보다 쓰레기통으로 곧장 쑤셔박힐 이력서의 빈칸을 채우는 일이 마음을 더욱 서럽게 했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는 원장의 신신당부를 배신할 수 없었다. 눈앞에 서서, 당당하며 떳떳하게 살고 있다고 자랑할 수 없지만, 얼굴 없는 부모를 생각해서라도 더욱더. 끼니때마다 먹는 라면이 똑 떨어져, 무료 급식소를 찾았을 때도 당연히.


*     


하는 일 없이 출근하는 짓은 고역이었다. 형벌이었다. 처음 며칠은 시답잖은 농담도 툭툭 던지던 다른 부서 사람들조차 일주일이 지나자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팀원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옥상 야외 휴게실 좁은 흡연 부스에서 담배 피울 때도 눈길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미친 바람에 휘날리는 치맛자락처럼 오두방정 떨던 핸드폰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만년 대리로 뒹굴더니…, 쯧쯧. 지방대의 한계야."


"그 소문이 사실이야? 업무에서 배제됐다는 게?"


"쳐다보지 마. 괜스레 얽히면 골치 아파."


저희끼리 소곤대는 목소리도 천둥처럼 들렸다.


"사고 쳤어?"


"기획팀은 그동안 조용했잖아?"


"저성과자라면 사고라고 할 수 있지."


"정말? 장 대리가 저성과자란 얘긴 지금껏 들어보지 못했잖아? 멀쩡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저성과자가 될 수 있나?"


"알 게 뭐야. 조 팀장이 찍으면 찍히는 거지, 별수 있어?"


"나도 자주 헷갈려. 누가 팀장인지, 만년 대리인지…. 설치다가 콕 찍힌 거야. 잘난 체하다가."


"조용히 말해. 엿듣겠다."


"상관없어. 이젠 누가 상대하겠어? 팀에서도 따돌림받는 모양이던데."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뺨에 느껴져 고개 돌리자, 수군대던 사람들이 동시에 외면했다. 복도에서 오며 가며 만나, 눈인사를 나누었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회사를 나가는 순간부터 팀원들은 물론이고, 뒷담화하는 저들과 맺었던 모든 관계는 먼지보다 가볍게 허공중에 흩어질 것이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지독한 외로움이 마음 가득 출렁거렸다.


그래, 이쯤이야 식은 죽이지. 보육원 시절까지는 아니더라도, 창문조차 없는 고시원의 비좁고 냄새나는 방에 홀로 누웠을 때 가슴 저미는 쓸쓸함과 비교하면. 신입처럼 앞뒤 생각 없이 무턱대고 사표 던질 생각은 꿈조차 꾸지 마. 엄두도 내지 마. 무슨 일이 앞으로 더 닥치더라도, 배알 없고 쓸개도 없다고 손가락질해도. 흡연 부스에서 나오자 바람이 목덜미를 스쳤다. 사무실로 내려갈 생각에 다리는 더없이 무거워졌다. 


"여기 있었네요. 팀장님이 찾던데요?."


박 주임이었다.


"지금 사무실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미팅이 있다고 아까 나갔거든요."


박 주임은 고급 정보라도 되는 양 의기양양하게 말하면서, 흡연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가 자초지종을 묻고 싶지만, 말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회식 이후, 매일 얼굴 보면서도 거의 이주 만에 처음 말을 건넨 터였다.


"몸정을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되도록 팀장님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사무실 앞에서 맞닥뜨린 황은 걸음을 잠시 늦추면서,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낮게 말했다. 내게 하는 말인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 정도로 찍힌 거야?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물음을 황의 등짝에 대고 말할 수 없었다. 사무실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은 탓이 오로지 나 때문이라고? 할 일 없이 책상 앞에 앉아 있다 보면, 숨 막히는 건 나뿐인데?


닮은꼴 조 팀장은 자리에 없었다. 팀원들은 하던 얘기도 약속처럼 멈추고,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고요함 속에서 마우스를 클릭하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지금껏 사무실에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다. 회식하고 난 다음 날부터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동료 몇도 슬슬 눈길을 피하더니, 급기야 입술까지 꽉 닫았다.


나도 듣는 귀는 있는 터라, 회식 2차가 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팀장이 합석한. 조직이 망가지면 부서 성과를 낼 수 없다는 식으로 항의할 수도 없었다. 나를 빼고서도 부서는 정상적으로 잘도 돌아가고 있었다. 세상이 늘 그런 것처럼.


"장백호 씨. 오후에 얘기 좀 합시다."


언제나 그렇듯 혼점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팀장이 말했다. 고개를 돌리자 대답도 듣지 않고, 팀장은 식판을 반납하러 걸어갔다. 팀장 옆에 황과 박 주임이 걸음걸이 맞추며 걸어가고 있었다.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황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박 주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입 안에서 모래알이 씹혔다.


눈총받는 신입을 에둘러 감쌌던 게 원죄인가? 집히는 구석이라곤 그것뿐이었다. 물론 업무 처리를 곧이곧대로 하는 원칙주의를 볼썽사납게 여기겠지만.


베트남 보고서 사건은 대놓고 무시한다는 걸 보여주는 강력한 신호 이상일 수 있었다. 이 정도로 여기니 그만두는 게 어때? 입 밖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물론 닮은꼴을 발견해서 기분이 상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공과 사는 구별할 수 있는 성인이 아닌가?


엊그제 출근할 때였다. 어이, 조 팀장! 헤어스타일이 바뀌었네?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걸어오던 본부장이 손까지 번쩍 들어 흔들며 말했다. 걸핏하면 팀장을 마주치면서 반갑다는 표정이 확연한 얼굴 앞에서, 장 대립니다, 말하지 못하고, 오늘 날씨가 참 좋습니다, 대꾸했다. 사실 몇 번, 장대리라고 밝혔다. 머쓱해하고 난처해하는 본부장을 생각해서 닮은꼴 조 팀장인 척했는데, 그게 귀에 들어갔나? 입 안에서 모래알이 서걱거렸다.


오후 내내, 팀장의 호출을 기다리며 모니터조차 없는 책상 앞에서 앉아 있었다. 고역이었다. 팀원들은 가끔 업무와 관련된 몇 마디만 저희끼리 주고받아, 사무실에 있는 게 분명했지만, 무인도에 홀로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퇴근할 때까지 팀장의 호출은 없었다. 동료들이 하나둘씩 사무실을 빠져나가도 집에 갈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회식하던 날 이후로 대리 기사 알바를 할 수 없었다. 악착같이 회사에 붙어 있을 생각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결국 사람은 죽는다는 절대 명제 앞에서 우울증이 찾아왔다. 그 끝에 닿을 때까지의 과정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다. 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거지? 오피스텔 원룸에 누워 잠을 설쳐가며 따지고 짚어봐도 원인은 하나였다. 내 생김새이거나 닮은꼴 팀장 놈이었다. 그렇다고 만년 대리 주제에 팀장을 어떻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작정하고 밀어내려 덤벼드는데,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도일을 만나 하소연이라도 해볼까, 속풀이로. 며칠 밤 궁리도 했다. 실제로 만나려고 전화도 했다. 그러나 없는 전화번호라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물기라곤 하나 없는 기계음 때문인지, 휑한 마음 때문인지, 왈칵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다. 싸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도일의 성향이 원망스러웠다.


원룸 밖, 어두운 거리가 눈에 가득 들어오면서. 보육원 시절에 불독에게 괴롭힘을 당하면 구석진 방, 은밀한 혼자만의 비밀공간에서 홀로 웅크리고 앉아 닦아내던 끈적한 눈물이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얼굴 없는 부모에 대한 원망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 비슷한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조 팀장이 식당에서 얘기 좀 하자고 말한 지, 사흘 지나서야 호출이 있었다.


"장백호 씨! 인사발령입니다."


조 팀장은 뒤돌아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닮은꼴 팀장의 등짝을 향해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발령이요?"


뜬금없이 무슨 개소리야? 불만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한편으로 반갑기도 했다. 빈 책상 앞에 하릴없이 앉아, 하루 종일 개무시당하는 것보다 낫지 않나, 싶었다. 문제는 어느 부서로 가느냐였다. 사무실의 시간은 쇠말뚝에 매어져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엘에이 지사는 좀…, 자질이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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