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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는 자수성가했다. 7

by 이순직 Jul 14. 2023

박 주임에 대한 배신감과 섭섭함이 마음에 고스란히 남아 있어, 시큰둥하게 말했다. 느닷없이 분노가 슬며시 피어올랐다. 모르긴 해도, 앞으로 얼굴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다. 다시 볼 일이 없으니, 분노도 무의미했다. 사직서는 내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전략기획팀에서 떨어져나와 화성 물류센터 창고지기로 지내야 할 터이니, 더는 업무로 만나는 사이는 아니었다.


수십 년을 보육원의 한 지붕 아래에서 살 맞대며 지내온 녀석들도 이제는 어렴풋하듯이, 처음 입사한 지방 지사의 동료들 역시 흐릿하듯이, 박 주임도 서서히 잊히겠지. 추락하는 마음을 애써 추스르고 사무실을 나왔다. 황은 보이지 않았다.


*


"백호야. 지금부터 내 말을 가슴속에 잘 간직해라.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맞닥뜨려도 꼭 명심해라. 이제 백호도 성인이라, 홀로서기를 해야 해. 유혹이 많을 거다. 나쁜 길로 빠지는 아이들을 많이 봤어. 실제로 교도소에 간 친구들도 꽤 있지. 천형이라고나 할까. 고아는. 운명이기도 하지. 하지만, 이건 분명한 사실이다. 앞으로 너의 선택에 따라 삶이 바뀐다는 것. 항상 선택의 압력에 짓눌려. 답답하지. 외롭고. 쉽고 가까운 길과 멀고 어려운 길. 두 갈림길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언젠가 있을 죽음이 달라져. 태어나 버려졌지만, 세상을 떠날 때는 사람들 속에서 떳떳한 죽음을 맞는 삶이어야 해."


보육원을 떠나던 날, 원장은 나를 따로 불러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내게 특별히 많은 기회를 주었던 원장이었다. 물론 그것 때문에 불독에게 괴롭힘을 당하긴 했지만. 아버지는 없어도, 길 떠나는 아들에게 당부하는 아버지의 표정을 읽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원장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오자,


"원장 놈이 몇 푼 쥐여주면서 잔소리했지? 하여간 꼰대짓은 어쩔 수 없다니까. 누가 말려?"


불독은 정착지원금으로 두둑해진 바지 주머니를 툭툭 치며 말했다. 대부분 통장으로 받는데, 불독은 굳이 현금을 고집했다. 원장도 말릴 수 없었다. 원장은 애당초 불독을 눈 밖으로 밀어냈고, 무슨 꼬투리라도 잡힌 듯이 몇 년 전부터 부딪치지 않으려는 눈치였다. 불독이 원장에게 대들었다는 얘기는 심심치 않게 들었던 터였다. 불독은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이었다.


"어디서 무엇이 되든 절 먹고 똥 잘 싸고, 숨 꼬박꼬박 쉬며 살아라. 먼저 간다."


불독은 주머니가 두둑해, 평소 같으면 하지 않던 인사말까지 하고, 손을 번쩍 들어 택시를 잡아탔다.


"가출팸이 저렇게도 좋을까? 쯧쯧."


도일은 택시 꽁무니에 대고,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가출팸이라니?"


"몇 달 전부터 어울리더라. 나도 오라는데, 됐다고 했지. 뭐랄까, 인생 대충대충 사는 나쁜 놈들 소굴 같더라니까. 그리고, 더 이상, 눈치 보는 더부살이는 질색이라. 포항에 가서 할 일도 있고."


"밤마다 몰래 나갔던 것도 가출팸과 어울렸던 거야?"


"덕분에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잖아?"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라 정 붙이면 위험할 텐데…."


"너도 참, 별종이다. 누가 보육원 기념물이 아니랄까 봐, 그렇게 당하고서도 걱정해주냐? 난 손톱만큼도 없다."


네거리 버스 정류장에 멈춰 섰다. 먼지를 잔뜩 머금은 마른 바람이 불어왔고, 도일은 짧게 휘청거렸다.


*


아무도 없는 오피스텔 원룸이지만, 벌건 대낮에 들어가는 게 낯설고 어색해서 걸음은 자꾸만 헛돌았다. 퇴근하면 잠시 쉬었다가 대리 기사로 뛰는 꽉 찬 하루가 몸에 익어서였다. 이르거나 늦은 새벽에 찬 공기를 마시면서 돌아갈 때, 원룸은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절실하고 달콤한 안식처였다.


언제나처럼 원장의 말을 되새기며, 오늘도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는 뿌듯한 발걸음으로 보도블록을 꾹꾹 눌러 걸어갈 때마다. 정한 곳 없이 동네 근처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저물녘이 되어서야 발길은 습관적으로 집으로 향했다.


"아저씨! 도와주세요!"


동네 초입에 들어서자, 걷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서 이맛살을 찡그리는 꼬마가 있었다.


"다리를 다쳤니?"


"모르겠어요. 갑자기 걷지 못하겠어요. 집에 가야 하는데…."


꼬마의 다리는 눈으로 보기에 멀쩡했다. 하지만, 표정에서 엄살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집이 어디야?"


"저어기!"


꼬마는 손가락으로 골목을 가리켰다.


"이렇게 하는 게 빠르겠어."


꼬마를 둘러업었다. 겉보기보다 묵직했다. 꼬마는 등에 업혀 이쪽으로, 저쪽으로 손가락으로 방향을 잡았다. 보기와 달리 몸무게가 제법 나간다고 잠깐 생각했지만, 보통 아이가 아니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숱하게 눈에 익었을 터이지만, 골목은 낯설었고, 동시에 와봤었다는 기시감이 들었다.


이상하네, 이 싸한 느낌은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권고사직과 다를 바 없는 창고지기로 추락해, 오후 내내 자괴감에 빠져 길바닥에서 허우적거린 탓일지도 몰랐다.


씨발, 사내답지 못하게, 정말 쪼잔하게 이런 식으로 나올 거야! 닮은꼴 조 팀장의 얼굴에 대고 버럭 성질내며 반말로 내질렀다면, 하는 일 없이 사무실에 갇혀있는 잉여인간 노릇을 얼마나 더 할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앙칼진 하극상을 연출할 악다구니도 없지만. 착한 사마리아인이 아닌가.


그래서 오히려 불독의 깡다구가 부러웠다.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길바닥에 조금씩 풀어 놓으면서, 그래도 견뎌내야지, 신입처럼 사표를 던질 수 없지, 내가 어디 객기부릴 형편인가. 쓸쓸한 자존감을 다독였다. 하이에나처럼 굴어야 한다는 불독의 충고가 자꾸만 떠올랐지만.


"여기에요. 내려줘요."


꼬마가 말했다. 고풍스러운 솟을대문이 눈에 익었다. 그리고 담벼락에 그려진 만(卍)자. 얼마 전에 노인과 함께 왔던 대문 앞이었다. 그때도 상당히 낯선 느낌에 휩싸여 어리둥절해, 며칠 뒤 다시 동네 산책하며 대문을 찾으려 했지만, 거짓말처럼 흔적조차 없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으니 황당할 수밖에.


"꼬마야, 할아버지 계시니?"


노인과 얘기해보면 뭔가 실마리를 잡아낼 수 있다는 추측에 꼬마에게 물었다. 꼬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뚱딴지같은 물음이라는 의아함을 얼굴 가득 내뿜으면서.


"여기, 같이 살지 않는다는 거니?"


"없어요. 왜요?"


꼬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한테 뭘 줬다는데, 그게…."


노인의 행방을 묻는 건 말짱 도루묵이고, 노인이 건넨 말을 설명하려니 당연히 앞뒤가 말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줬다고 하는데, 받은 게 없으니, 당연히 무얼 주었는지 물어보려는 이유도 설득력이 없었다. 이상한 아저씨로 취급받기 딱 좋았다. 꼬마가 정신 나간 이상한 사람이라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다. 아무것도."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꼬마는 고개를 가볍게 까닥거리고 나서, 대문 안으로 순식간에 들어갔다. 그 짧은 순간에 대문 안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당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 공간에 희뿌연 안개만이 가득했다. 안개가 아닐지도 몰랐다. 거대한 흰 천으로 시야를 막은 것 같기도 했다.


찾으려고 그렇게 애를 써도 없더니, 대문 안도 수상하기 짝이 없네. 동네에 이런 집이 있는 게 정말 뜻밖이야. 그런데 노인이 여기에 살지 않는다고? 곡할 노릇이네. 내가 헛것이나 귀신을 봤다는 건가? 기억이 조금 흐릿하지만, 분명히 노인을 부축해서 이 집으로 왔었는데…. 고풍스러운 솟을대문을 다시금 쳐다보았다.


골목 초입에서도 금방 눈에 띄는 유별난 대문인데도 그동안 왜 찾지 못했는지, 아리송할 따름이었다. 세상에는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일들이 많다고 하는데,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눈깔 깔아, 이 새끼들아!"


불독은 보육원에 들어온 첫날부터 아이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등교하는 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잘거리는 여자애들도 예외 없었다.


"나 쳐다보지 마라. 분명히 경고했다. 그리고 떨어져. 안 그러면 주먹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 더러운 고아 새끼들!"


불독은 언제나 무리에서 몇 발짝 떨어져 등교했다. 학교 친구들은 몰려다니는 보육원 아이들을 걸핏하면 손가락질하며 놀려댔다. 저리로 가자, 거지들 온다. 거의 모두 예외 없이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터여서, 보육원 아이들끼리 어울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불독은 달랐다. 절대로 보육원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오히려 학교 친구들과 어울리며 보육원 아이들을 놀려대고 괴롭혔다.


"자기도 버림받은 주제에, 정말 꼴사납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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