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보름쯤 지나자, 업무가 어느 정도 손에 익었다. 그러나 파트장을 비롯해 동료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사생활은 절대로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내 탓도 있지만,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동료들은 그들 나름의 견고한 벽을 구축하고 있었다. 마치 외지인을 대하는 토박이들만의 보이지 않는 방어막이랄까.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서먹한 관계가 오히려 스트레스였다.
동료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애초의 생각은 헛다리 짚은 것이었다. 결단이 필요했다. 매끄러운 일 처리를 위해 어느 정도 끈끈한 유대 관계가 필요했다. 업무 처리 때문에 수시로 얼굴을 마주하는 눈치가 가장 약한 고리였다.
"불금인데, 퇴근하고 한잔할까요?"
먼저 다가서는 수밖에 없었다.
"글쎄요…."
눈치는 파티션 너머로 파트장을 살폈다. 파트장은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온다간다는 말도 없이 슬그머니 사무실을 혼자 빠져나가는 타입이었다. 유심히 관찰하지 않으면 파트장의 퇴근 사실도 모른 체 무작정 책상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 파트장이 나가면 약속 때문에 부득이한 동료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역시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나 바람처럼 사라졌다. 가끔 파트장이 사무실로 되돌아오는 때도 있었다. 다음 날 자신보다 먼저 퇴근한 직원이라며 면박했다. 사람이 말이야, 그따위 정신머리로 월급을 받아 처먹어? 직장이 놀이터야? 가정교육을 도대체 어떻게 받은 거야? 위아래도 구별하지 못하고! 정신머리가 썩었어!
사무실 가득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목소리를 높였다. 당사자는 서툰 핑계조차 둘러댈 엄두도 내지 못하고, 누구 하나 듣기 거북하다고 불편한 기색조차 없었다. 오히려 다들 주눅 든 표정들이었다. 본사에서는 꿈조차 꿀 수 없는 대단히 낯선 풍경이었다. 군부대 막사 안에서 있을 법한.
"그럴까요?"
파트장이 사무실을 나가자, 눈치는 다른 동료들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업무와 관련된 얘기나 자신들의 농담도 아무렇지 않게 말하더니, 눈치는 동료들 낌새를 살피는 건가? 나도 모르게 뒤늦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동료들은 자기들끼리 사소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나와 눈치가 같이 있는 걸 자주 봐와서인지, 가벼운 눈길마저 없었다. 파트장이 사무실을 나가고, 한 시간쯤 지나서 퇴근했다.
"이상하죠?"
눈치는 내일 당직이라면서 카페를 가리켰다.
"당직이면 오히려 내가 미안한데요. 커피 좋죠."
"아니, 사무실 분위기요. 한 달 넘게 근무해보니까, 이상하죠?"
"사실, 낯설어요. 적응하기가 쉽지 않네요. 뭐랄까요? 가부장적인 분위기?"
토박이들의 보이지 않는 벽이 실은 다른 것일 수도 있다는 짐작이 언뜻 들었다. 절대 권력 앞에 벌거벗은 채로 몸을 도사리는 절대 순종의 부작용? 카페는 조용했다.
"적응하지 마세요. 그냥 한 발짝 떨어져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세요. 어차피 본사로 돌아갈 거잖아요?"
눈치는 심통 난 표정이었다. 내가 자신과 처지가 다르다는 확신에서 비롯한 심통이었다.
"돌아가요? 본사로? 내가요?"
"파트장이 그러던 데요? 아닌가요?"
심통 난 표정을 뚫고, 의아함이 피어났다. 파트장은 처음부터 나를 찍어서, 동료들과의 유대감을 쌓지 못하게 했나?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눈치 앞에서 속내를 털어놓으면 고스란히 동료들 귀에 들어가겠지? 파트장은 말할 필요도 없고. 당직이어서 술을 마시지 않는 게 아니라, 애당초 멀찌감치 거리를 두겠다는 속셈이구나! 알코올이 없으니 눈치의 속내는 고사하고, 개인적인 친분을 쌓을 수조차 없겠네.
그러고 보니, 사무실에서의 표정과 별반 다르지 않네. 닮은꼴 조 팀장의 권력에 비하면 너무나도 작고 보잘것없는 파트장의 권력이 더 악질이구나! 감언이설로 부하 직원을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쪽과 우람한 덩치를 앞세워 절대복종을 강요하는 쪽. 굳이 비교하자면. 내 추측으로.
"처음도 아닙니다. 본사에서 내려온 사람은 기껏해야 반년 정도 있다가 다시 올라갔거든요. 얼마 지나지 않아 퇴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엥?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5년 가까이 전략기획팀에서 일하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얘기잖아? 하긴 부서가 다르고, 눈에 띄는 사람이 아니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지. 하찮은 사내 동향에 대해 일일이 신경 쓸 만큼 업무가 한가하지도 않았고.
"처음이 아니어서, 내가 들어가면 사무실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는 거였네요?"
"아니라고 할 순 없죠. 곧 퇴사할 사람이니까요."
나도 알지 못하는 내 앞길을 고스란히 알고 있다는 말투였다. 얼치기 박수무당처럼. 아니, 진짜로 신점이라도 봐야 하나? 고풍스러운 대문까지 업어주었던 꼬마한테서. 하지만 그 집을 찾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다음날 골목을 이 잡듯 뒤져봐도 끝내 찾지 못했는데.
"그럴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파트장의 특별한 호출이 있을 거예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눈치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툭, 던지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지인을 바라보는 토박이의 무심한 눈빛이었다.
"특별한…, 호출이라니? 무슨 일로요?"
엉거주춤 뒤따라 일어나며 물었다. 눈치는 빙그레 웃었다.
"지금은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해요. 그럼, 안녕히."
아무 미련도 없다는 눈치의 싸늘한 등짝을 바라보자 못내 섭섭했지만, 이미 외지인으로 찍은 낙인을 당장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본사에서 내려온 사람은 결국 퇴사한다는 징크스를 깨지 않고선 창고지기도 떨려날 수밖에 없었다. 절박했다. 여기서도 버티지 못하면 루저라고 손가락질당해도 어쩔 수 없고, 뒤늦게 알게 되어 보육원 출신이 그러면 그렇지, 혀를 차도 대꾸할 말이 없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꼬였던 걸까? 지방 지사에 말단으로 입사해서 본사 전략기획팀까지 승승장구하던 내가. 이제 겨우, 가까스로 주변을 둘러볼 수 있어 기부금 마련을 하기 시작한 내가. 닮은꼴 팀장이 낙하산으로 내려왔을 때부터? 기억하지 못하는 늦은 밤, 보육원 정문에 버려지던 날부터? 아니면, 찢어질 이력서를 수없이 쓰던 취준생 무렵, 불독이 허름한 자취방에 찾아왔던 그 순간부터?
*
"이게 몇 년 만이고? 반갑다!"
알바를 끝내고 자취방에 돌아오자마자, 방문이 벌컥 열리며 불독이 들이닥쳤다. 어두워진 골목을 걸어오면서 등 뒤에서 미심쩍은 인기척을 느꼈지만,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보육원을 나오던 날, 호기롭게 택시를 잡아타고 떠난 뒤, 처음이었다. 배고픈 대학 시절 간혹, 그야말로 어쩌다 우연히 불독을 떠올리긴 했어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염려하지 않았다. 어떻게 지내는지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길바닥 생활을 이어가고 있으리라는 막연한 추측만 할 수 있었다.
도일은 포항에서 소식을 전해왔더군. 자세한 얘긴 하지 않지만, 아버지와 사이가 여전히 껄끄러운 모양이던데, 은근히 신경 쓰여. 넌 학교에 열심히 다니고? 그런데 불독은 통 소식이 없어. 녀석이 제일 걱정이야. 보육원의 기부금을 마련하기 위한 모임에 참석해달라는 원장의 요구가 있었다. 나를 보육원의 성공 사례로 내세우고 싶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보육원에 찾아갔을 때, 원장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창밖으로 내다보았다. 정작 도일이나 불독을 걱정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야! 먹을 거, 없냐?"
불독은 싱크대도 없는 자취방을 둘러보며 대뜸 얼굴부터 찌푸렸다. 반가움보다 덜컥, 내려앉은 심장이 여전히 두근거렸다. 명치 끝이 아려왔다. 보육원의 숱한 날들은 기억의 안쪽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덩치가 엇비슷해졌다고 해도 드잡이할 수 없었다. 불독의 불같은 성질머리를 감당할 수 없었다.
"쌀은 없고…, 라면은…, 있는데, 해줄까?"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두부는 있냐? 먹어야 하는데."
"없는데."
"사와."
불독은 팔베개하고 방바닥에 벌러덩 누웠다. 끼니는 편의점 값싼 도시락이나, 어쩌다 여유가 생기면 시장통 먹자골목에서 해결했다. 라면은 마지막 한 봉지 남은 비상용이었다. 십 원 동전까지 탈탈 털어서 두부를 사 오자, 불독은 슬그머니 일어나 앉아 한 입 베어 물고, 방구석으로 밀었다.
"라면에 넣는 게 아니었어?"
"왜 넣냐? 밍밍하게."
휴대용 가스버너 위에서 냄비 물이 팔팔 끊어도 불독은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았다. 보육원 시절과 조금도 다름없었다. 나는 냄비에 라면을 넣었다.
"김치는?"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