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게. 확, 소문 내버릴까?"
도일은 앞서 걷는 불독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투덜거렸다.
"뒤탈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어차피 곧 졸업인데."
도일이 불독과 맞짱 뜨면 결과는 뻔했다. 머리통 하나 정도 훌쩍 큰 키와 못 말리는 식탐 탓으로 덩치는 비쩍 마른 도일의 두 배였다. 일방적으로 얻어터질 수밖에 없었다.
"도일이 새끼, 너지!"
졸업하고, 길고 긴 겨울이 지나 고등학교에 입학을 한 지 몇 달쯤 지났을 때, 불독은 잔뜩 화난 표정으로 도일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이거는 거야?"
도일은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내 짝꿍이 어떻게 알았겠어? 네 놈이 말해 준거지?"
도일은 불독과 같은 반이었다. 보육원 뒤뜰에 여전히 겨울바람이 남아 있었다.
"아니면 너냐?"
불독은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도일보다 키가 살짝 작은 나는, 불독의 팔 힘에 몸이 허공에 붕 뜬 기분이었다.
"누가 너 짝꿍인지도 모르는데?"
나는 억울했고, 불독의 돌주먹이 무서웠다.
"분명히 둘 중 하나야. 다른 아이들은 죄다 학교가 다르잖아? 평소에도 아니꼽다는 눈빛이었지? 틀림없어! 도일이 아니면 백호, 너냐?"
그 순간, 불독의 돌주먹이 날아왔다. 명치 끝에서 통증이 결렬하게 꿈틀거렸다. 작정하고 두들겨 패는데,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고자질은 몇 배의 고통으로 되돌아올 뿐이었다.
"난 고아가 아니란 말이야! 알아들었어? 잠시 여기서 지내는 것뿐이야!"
불독은 이 악물고 소리를 씹듯이 돌주먹을 명치에 꽂을 때마다 한 마디씩 힘주어 말했다.
"고아원에서 산다고, 다 같은 고아 새끼인지 알아? 틀렸어!"
불독은 주먹을 내뻗을 때마다 얼굴이 일그러졌다. 화살보다 빠르게 꽂히는 주먹에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는 통증이 명치 깊숙한 곳에서 휘몰아치는데, 불독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보였다. 나는 이를 악물며 뼛속 깊이 파고드는 아픔에 이를 앙다무는데, 정작 울음 우는 쪽은 불독이었다.
도일은 이미 제 자리에 꼬꾸라졌고, 나는 그 옆에 쭈그려 앉았다. 통증은 늘 낯설었다. 몇 번의 발길질을 견디다가 고개 들자, 불독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오만상을 쓰면서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처럼 부모 얼굴이 애당초 없다면 몰라도, 대부분은 어떻게 버려졌는지 서로 털어놓지 않아도 어림잡아 대충 어림짐작했다. 그런 짐작은 얼추 맞아떨어져 끈끈한 공동체 의식이 생겨났다. 하지만 불독에 대한 소스는 원장실에서 한 마디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사람을 죽여본 적도 없는 것들이! 뭘 안다고 씨부렁거려!"
불독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얼굴은 한없이 일그러졌다.
*
"낙하산이야? 미역국이야?"
파트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혼잣말했다. 경계하는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무슨 말씀인지?"
"낙하산이면 감시하러 온 것일 테고, 미역국이면 생존경쟁에서 밀려난 거죠. 어느 쪽입니까?"
출근 첫날부터 보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슬그머니 말을 놓는 것은 책임자이자 연장자이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낙하산이나 미역국이란 말을 등 뒤에서도 아니고 앞에서 대놓고? 애당초 기를 눌러놓아야 자신이 편하다는 서열 의식이 거의 강박관념 수준이네.
"인사이동이죠. 전출이요."
"그건 겉으로 보기에 그렇고. 듣기 좋게, 점잖게 하는 말이지요."
인정사정없이 잔인하게 밀어붙이네. 그걸 꼭 말을 해야 하나? 아무튼 파트장과 처음부터 틀어지면 창고지기 노릇도 만만찮을 텐데.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였다. 파트장의 눈치를 보거나 아부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대체 나한테서 뭘 원하는데? 뜨악한 얼굴로 파트장을 바라보았다.
파트장의 입가에 엷은 웃음이 자그맣게 피어났다. 나름대로 기를 충분히 눌러놓았다는 만족감이었다. 비록 지금은 창고지기로 전락했지만, 전략기획팀에서 일했다는 자부심은 남아 있었다. 물류센터 파트장이라고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딱 부러지게 어느 쪽이라고 대답을 강요하는 모양새라, 적잖이 언짢았다. 그리고 난감했다.
"푸하하."
파트장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신병 군기 잡듯 몰아붙이는 팽팽한 긴장감이 한순간에 흐물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져 흩어졌다. 긴장이 살짝 풀렸다.
"농담이야. 난처했다면 미안해요."
역시 서열정리였어. 직급은 대리에 불과해도 전략기획팀에서 일했으니 무시할 수 없겠지. 암튼 강아지도 아니고, 대체 뭘 하는 짓인지. 신고식치고 유치찬란하네. 열댓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나도 남자지만, 하여간 남자들의 세계는 모조리 거기서 거기야. 처음 만나면 무조건 위아래부터 따지고 들어야 한다니까. 파트장은 히죽히죽 웃었다.
"보아하니, 감시나 고자질하는 암행 순찰 짓은 하지 않겠지? 앞으로 잘 부탁해요."
파트장은 손을 내밀었다. 나도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악수했다. 그 순간, 손가락 마디가 유압 프레스에 짓눌려 으깨지는 뜨거운 통증이 밀려왔다. 뭐야? 아직도 기 싸움? 확실한 복종을 끌어내는 마침표를 확실히 찍겠다는 건가? 단순한 서열정리라고 하기엔 뒤끝이 있네? 황급히 손을 빼려 했지만, 파트장은 대단히 여유로운 미소를 얼굴에 가득 담고, 잡은 손을 서너 번 흔들며 지그시 웃었다. 이 정도면 내 뜻을 충분히 알지? 그런 눈빛을 노골적으로 지었다.
"잘 부탁한다고, 장 대리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무렴요."
그제야 파트장은 손을 놓아주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뭔가 부끄러운 짓이 있는 걸까? 만나자마자 대뜸 암행 순찰이 어쩌고저쩌고 떠들어대는 걸 보니 의아했다. 수상했다. 부끄러운 짓을 넘어 구린내 나는 못된 짓을 하지 않고선 할 수 없는 악수였다.
거대한 규모의 창고들은 물론이고 사무실조차 낯설었다. 같이 일하게 될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파트장과 인사한 이후로 일일이 악수하며 이름을 나누었지만, 기억할 수 없었다. 출근 첫날이니 당연했다. 첫날이라, 파트장의 속내를 꼼꼼하게 들여다볼 여유는 없었다.
업무에 재빨리 익숙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동료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풀어가야 했다. 사람에게 받는 스트레스는 업무의 고강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기획팀에서와 마찬가지로 동료들과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했다. 걸핏하면 들이대는 황을 마음에 두었다가 정신조차 조금씩 황폐해졌던 날들을 떠올렸다.
보육원 출신이라, 어쩔 수 없었다. 돌이켜보니 현명하지 않았다. 그런데, 황이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닮은꼴 팀장에게 몰방하는 모습에 이상하게도 다시금 또 상처받았다. 마음은 황에게서 이미 멀어지기 시작했는데도. 사랑은 움직이는 거라며 겉멋을 입에 달고 다니더라도 하루아침에 손바닥 뒤집듯 남자를 갈아치울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사무실과 창고 일이 서로 매치가 되는 게 기본입니다."
창고 여섯 동을 함께 둘러보던 눈치가 말했다.
"그리고, 지게차 운전면허를 따셔야…, 본사에 있었으니 어렵겠지만요."
"지게차요? 왜요?"
"언제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면허도 기본입니다."
일찌감치 겁주려는 건지 몰라도, 물류 쪽은 맹탕이라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뭇 조심스러운 태도가 신참을 대하는 투가 아니었다. 파트장보다 심하지 않지만, 본사에서 내려온 조심해야 할 상대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경계하는 낌새가 역력했다. 이러다가 여기서도 박쥐가 될까, 살짝, 불안감이 몰려왔다.
"아까 사무실에서 줄곧 날 살피던데, 파트장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까놓고 얘기하면 본사에서 쫓겨난 거니까, 편하게 대하세요."
보육원 출신이라는 말은 당연히, 절대로 할 수 없었다. 개인적인 사항은 내가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알 도리가 없을 테지만, 좌천당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아도 언젠가 알게 될 터이니 미리 까놓는 게 편했다.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은 당사자가 아닌 사람에게로 흘러가지 않던가. 화성과 서울은 비교적 거리감이 있지만, 결국 같은 회사가 아닌가. 본사에 소식통이 없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아무리 거대한 댐으로 물을 막는다고 해도, 홍수가 지면 댐을 타 넘고 흐르지 않던가. 소문은 댐에 갇힌 물보다 끈질겼다.
"사람은 말보다 행동이…, 오해하진 마세요. 초면에 무슨 감정이 있겠어요? 판단도 없어요."
눈치는 곁눈질하면서 고개를 까닥거렸다. 틀린 말은 아니네.
"본사 돌아가는 소식은 가끔 듣지만요."
눈치는 사무실로 발길을 잡으며 말했다. 역시 소식통이 있어. 옆에서 걸음 맞춰 걸으면서,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다. 하긴, 내가 내 마음을 상대하는 것처럼 손쉬운 타인이 어디 있으랴. 본사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이 징검다리처럼 사람들 사이를 건너뛰면서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은근히 걱정이 앞섰다.
파트장이 관심병사처럼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한다는 귀띔을 이미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농담이라며 얼버무렸지만, 흡사 서열정리처럼 여겨지는 기 싸움도 본사에서 흘러나온 말들 때문일지도. 대체 무슨 말들일까? 궁금하네. 차량 부서 마당발 계장이 설핏 떠올랐다. 계장이 소식통이라면 나에게 불리할 말은 하지 않을 터인데, 기획팀에서 떨려난 터라, 확신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