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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는 자수성가했다. 10

by 이순직 Jul 17. 2023

말끝을 흐렸다. 불독의 눈길을 외면했다. 지금 장난해? 당연히 한 소리 쏘아붙일 거라 짐작했지만, 냄비를 끌어당겨 젓가락질했다. 군소리 없이 먹는 걸 보니, 한시름 놓였다. 그동안 어느 길바닥에서 무슨 짓을 하며 살았는지 하는 따위의 궁금함보다 어떻게 나를 찾아냈는지 묻고 싶었다.


악연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질긴 동아줄일까? 불쑥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두렵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불독의 먹는 모습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허기보다 무서운 놈은 없었다. 라면을 먹는 동안 질문을 할 수 없었다. 우리만의 불문율이었다.


"날 어떻게 찾았어?"


"인마! 라면이 아까워?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으니 형제라면 형제인데, 이까짓 라면으로 위세 떨려고?"


"그게 아니라…."


변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말꼬리를 잡아 해코지할지 걱정이 앞섰다.


"다, 아는 수가 있지. 며칠 여기서 지내야겠다. 너는 지금 딱, 봐도 하나도 변한 게 없네. 그러니 이러고 살지. 내가 말해주지 않았나? 하이에나처럼 살아야 한다고. 착하게 살아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없으면 빼앗아야지. 라면이라도.


불독은 냄비를 방구석으로 밀어내고 벌러덩 누워 팔베개했다. 대짜로 누워, 천장 모퉁이마다 곰팡이가 슬어 벽지 색이 검어진 부분을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창문 턱에 빗물이 스며들어 벽지가 너덜너덜해진 부분도 있었다. 불독이 한숨을 쉬었다.


"흑마술이 판치는 세상이야. 신문이나 방송도 모조리 자기 잘났다고 떠들잖아? 세뇌하려고.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아깝잖아? 흑마술에 빠져들어 꼭두각시로 사는 건. 그래서 네가 한심하다는 거야. 새파랗게 젊은 놈이 냄새나는 좁은 방구석에서 뭐 하는 짓이냐? 그나저나, 같은 하늘 아래인데도 사회 공기는 확실히 다르네."


"지난달에 도일을 만났는데, 녀석이 알려준 거야?"


"그게 왜 궁금하냐? 아무려면 어떠냐? 설마, 불편하냐? 내가 여기 있는 게?"


이런 자취방도 없으면서, 꼴에 트집을 잡기는…, 표정은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사뭇 딱딱하게 굳어진 내 얼굴을 불독은 빤히 노려보았다. 벌떡 일어나, 금방이라도 명치 끝에 돌주먹을 꽂을 기세였다. 보육원 시절이었다면 이미 그러고도 남았다. 한번 정해진 서열은 숱한 세월이 흘러도 요지부동이었다.


"불편한 게 아니고…, 그냥…, 신경이…."


"불청객이란 거네. 내가 귀인인지도 모르지. 암튼 편하게 있을 테니 관심 끊어. 그런데 용가리 통뼈 집안이 아니고선 어딜 취직해도 실컷 부림만 당하다가 내쫓겨. 너나 나나, 고아 출신은 가난한 길을 살도록 흑마술에 걸려들었어. 알아? 그러니 너무 애쓰지 마라. 아득바득 기 쓰지도 말고."


어디서 무슨 얘기를 들으며 살아와서, 흑마술이니 용가리 통뼈 집안이니 하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를 내 앞에서 하느냐고, 도일이라면 대뜸 면박을 날리겠지만, 상대는 불독이었다. 도일이었다면 세상이 아무리 삐딱하게 나오더라도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한바탕 잔소리까지 늘어놓을 판이지만,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불 꺼라. 자자. 피곤하다."


하나뿐인 베개마저 양보하고, 자리에 누워도 잠은 오지 않았다. 잠은커녕 오히려 의식이 점점 또렷해졌다. 언제까지 빈대 붙을까? 그동안 무엇을 하면서, 어디서 누구와 어울렸기에 뚱딴지같은 소리를 지껄이는 걸까. 흑마술? 그럴지도 모르지. 불독이 보면. 세상 모든 논리가 몇몇 사람을 중심으로 짜여 있어, 착취와 협박이 다반사일 수도.


하지만, 나는 정직해야 하지 않나. 지방대 출신이나 고아 앞에 펼쳐진 길이 진흙탕이더라도. 무엇보다 다른 원생들에 비해 많은 도움을 준 원장을 생각해서라도. 얼굴 없는 부모가 원하지 않은 생명이어서 보육원 정문에 버려졌더라도. 골목을 휩쓰는 밤바람 소리가 을씨년스러웠다.


*


일 년이 훌쩍 지나갔다. 창고지기 일도 손에 익었다. 전략기획팀이어서, 직급 높은 타 부서 사람들이 껌뻑 죽는시늉까지 마다하지 않아 느끼는 묘한 우월감 따위는 없더라도, 나름 괜찮은 생활이었다. 오히려 끊임없이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는 스트레스가 없어 편했다. 적어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류와 달라요. 물건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오기했을 리도 없고…."


여전히 곁을 내주지 않은 눈치지만, 달리 얘기할 상대가 없었다. 눈치는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말해서, 한두 달이면 알아낼 거라고 봤어요. 전략기획팀이었다면서요? 난 입사하고 보름 만에 알아냈는데."


어이없음이 슬그머니 비아냥으로 넘어갔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나요?"


"늦었지만, 파트장이 호출할 겁니다. 친목이나 도모하자면서."


"네?"


지난 일 년 동안 가만히 있다가 뜬금없이 친목 도모? 빠지지 않았던 회식 자리에서 외지인 취급을 하더니? 설마 파트장이 몰래 물건을 빼돌렸다는 건가? 한두 푼도 아닌데, 몇 년 동안 계속? 평소 파트장의 카리스마에 짓눌린 이유를 알 것도 같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도둑질을 눈감아 준다? 방관자가 아니라 동조자 아닌가? 어쩌면 파트장이 직원들을 입막음했을지도.


"솔직하게 얘기해 주면 좋겠는데요."


"뭘요?"


눈치는 눈치가 빨랐다. 더 이상 전략기획팀에 속하지 않아 아무 힘도 없는 창고지기라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고, 본사로 불려 가서 퇴직당할 거라는 확신이었다. 표정에서 빤히 보였다. 할 말 없다며 사무실로 걸어가는 눈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척결해야 할 개인적인 비리로 보이지만, 그동안 내내, 눈치를 비롯해 다들 아랑곳하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어쩌면 파트장 혼자만 잇속을 차린 게 아닐 수도 있었다. 동조자를 넘어 협조자일 수도 있었다. 침묵의 대가로 얼마간 챙기거나, 파트장의 눈 밖에 나지 않는 안전지대를 확보했을 수도.


동료 전체를 상대로 싸울 순 없었다. 요란스럽게 행동하면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고, 동료들이 수군거릴 터였다. 파트장과 담판을 지어야 하나? 동료들이 알지 못하게 조용히 처리할 방법은 그 수밖에 없나? 어쨌든 파트장이 자리를 마련한다니까.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도 평소와 다름없었다. 자연스럽게 사무실 이곳저곳을 하릴없이 오락가락하던 파트장은 잠시 한눈판 사이에 감쪽같이 사라졌고, 한참 후에야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했다.


"파트장이 모르던가요? 내가 알고 있다는 거?"


"보고했죠. 오늘은 건너뛰나 보죠."


눈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시큰둥하게 말했다. 지난 일 년 동안의 일거수일투족을 고스란히 고자질했다는 자백이기도 했다. 씁쓸했다. 내 딴에 눈치가 그나마 가벼운 정이라도 붙일 수 있는 동료로 여겼다. 정말이지 동료애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싸늘한 등짝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아무리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고 해도 일하면서 쌓은 정이 이처럼 쓸모없고 허접한지, 다시금 느꼈다. 필요에 따른 친밀성은 언제나 이익과 밀접했다.


일주일째, 파트장은 아무 신호도 보내지 않았다.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전략기획팀에 있을 때 느꼈던 따돌림 같은. 투명 인간 취급당하는. 하지만, 파트장의 비리라는 카드가 있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파트장은 나와 마주치면서도 아무런 긴장감도 없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업무 점검을 하거나, 실없는 농담마저 툭툭 던졌다.


비록 이빨 빠진 호랑이 꼴이지만, 파트장의 개인적인 비리는 덮어둘 수 없다고, 아직도 본사 전략기획팀에 연줄이 있다는 식으로 비장의 카드를 내밀 순간을 기다렸다.


"오늘은 본사 비서실에서 사람이 내려온다니까, 다들 알고 있지요? 특별히 말조심하세요."


파트장은 출근하자마자 특유의 쇳소리로 사무실을 압도했다.


"그리고, 장대리가 전담하면 좋을 듯합니다. 본사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으니까, 우리보다 말이 잘 통하겠지. 그렇지 않습니까? 장대리!"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긴다고? 파트장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그…, 그런가요?"


파트장의 잘못된 행동을 조용히 고쳐보려는 주제넘은 계획을 건너뛰어, 비서실에 비리를 직보한다? 그다지 썩 내키는 판단은 아니었다. 파트장도 집에 들어가면 아버지일 터이고, 하루아침에 불명예 퇴직을 당한다면, 두고두고 삶의 오점으로 남을 것이고…. 파트장의 비리를 틀어쥐고서, 도덕적 우위를 선점해 뭘 어떻게 해보려는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다만, 동료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싶었다. 파트장이 변한다면, 억압과 회유의 굴레에서 벗어난 동료들이 더는 외지인 취급하지 않을 것이다…. 사표는 쓸 수 없었다. 창고지기에서 추락하고 싶지 않았다.


"장대리! 회의 끝나고, 잠깐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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