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그래서, 그는 자수성가했다. 11

by 이순직 Jul 18. 2023

파트장은 그동안 절대로 하지 않던 눈맞춤까지 했다. 떨리거나 초조한 눈빛이 아니었다. 자신의 비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짐작이 실린 눈빛이었다. 염려나 걱정은 보이지 않고, 당당함과 자신감마저 엿보였다. 회의가 끝나고, 파트장에게 갔다.


"장대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요.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파트장은 책상 위 서류를 뒤적거리며,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 하지만 호저처럼 날카로운 가시털을 한껏 치켜세운 말이었다. 가만히 놔두는 게 좋을 거야. 시비 걸거나 공격하면 오히려 치명상을 입게 될 거니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무슨…,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내가 맡은 창고뿐만 아니라, 다른 창고에서도 물건이 사라지는…."


"장대리!"


파트장은 고개 들어 나를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화가 잔뜩 난 미간을 찡그렸다. 위압감이라도 주려는 듯 거대한 몸집이 좌우로 꿈틀거렸다. 곰 발바닥을 닮은 우악스러운 손등이 두 눈에 꽉 차게 들어왔다. 뼈마디를 으스러뜨릴 듯 불끈, 주먹을 움켜쥐었다. 가볍게 책상머리를 툭툭 내리쳤다.


"장대리가 아직 뭘 몰라요. 세상은 장대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교과서대로 흘러가지 않아요. 알겠어요? 혼자 정직한 척, 깨끗한 척, 하지 말란 겁입니다. 뒷감당도 못 하는 일을 저지르면, 나도 골치 아파지니까, 적당히, 형식적으로 비서실 사람을 접대하란 겁니다. 알겠어요? 그리고, 처음 말하는 거지만, 급여 통장 꼼꼼히 보지 않지요? 이렇게까지 얘기했으니, 알아들었다고 봅니다. 그만, 나가 보세요."


협박인가? 회유? 급여 얘기는 이미 덫에 걸려들었다는 말인가? 사실, 이유를 알 수 없는 돈이 급여와 상관없이 물류센터 이름으로 찍혀 있었다. 액수가 그다지 많지 않은 데다가, 내가 모르고 있는 급여 외 항목일지도 몰라 내내 넘어갔던 터였다. 기회가 되면 물어보려던 참이었다. 그건 그렇고, 파트장의 협박에, 현재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하기 전에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자칫 어설프게 문제를 제기했다가, 그렇지 않아도 외지인 취급받는데, 완전히 골로 갈 수도 있었다. 신중해야 했다.


오전 내내 창고에서 일하면서, 협박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골몰하다가, 파트장의 호출에 사무실로 올라갔다. 눈에 익은 여자가 서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황이 환하게 함박웃음을 지었다. 방긋방긋 웃었다. 예상외였다. 비서실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황이라니! 뭔가 착오가 있지 않나?


"지금부터 우리 장대리가 안내할 겁니다."


파트장은 <우리>란 단어에 힘을 주었다. 피검자를 대표한다는 뜻이었다. 황 앞에서 얼굴이 당혹감에 휩싸였다. 뜻밖이었고, 당황스러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직장 상사였는데, 이제는 본사 사람을 접대해야 하는 처지였다. 모멸감을 느꼈지만, 가슴 아래로 꾹꾹 눌렀다.


"이곳 생활은 어때요? 땀 냄새가 나니, 힘든가 봐요?"


창고로 걸어가면서, 옆에 바짝 붙어, 차갑기만 하던 황답지 않게 나를 살뜰히 살폈다.


"섭섭해요.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났잖아요? 오피스텔로 찾아갈까, 몇 번이나 망설였다고요."


다시, 새롭게 시작하자는 이 말투는 뭐지? 살갑게 대하는 이유가 뭐지? 오랜만에 만나서? 지난 연애가 인제 와서 애틋해서? 황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다고 여겼는데, 심장이 살짝살짝 조금씩 들썩거려 마음이 이상해졌다. 함께 나누었던 달콤한 시간이 허공으로 흩어져 몸정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도, 마음에서 끝내 떨쳐낼 수 없는 걸까?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 걸까?


"잘 지내고 있는 거죠?"


"검수팀에서 오지 않고, 왜 전략기획팀에서? 비서실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지나버린 예전의 직장 계급에 얽매고 싶지 않았다. 전략기획팀의 대리와 창고지기 대리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말머리를 돌렸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황은 방긋방긋 웃었다.


"본부장님 특별 지시라서요. 비서실로 자리를 옮겼어요."


"그래요?"


화성 물류센터에 감사 나온 것이 본부장의 지시인지, 비서실로 옮긴 것이 본부장의 의도가 숨어 있는 인사발령인 알 수 없었지만, 깜짝 놀랐다. 황이 비서실에? 전략기획팀에서 비서실로 영전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고 말만 들었지, 더구나 여자가? 전략기획팀과 비서실의 업무는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여러모로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전략기획팀이 그룹의 전체적 운영에 주력한다면, 비서실은 회장과 미팅하며 미래 먹거리를 위해 사업 의제를 설정했다. 물론 오너 가족의 자질구레한 일들도 처리했다. 광고를 미끼로 총수 일가의 부정적인 언론 보도를 통제하는 역할도 했다. 몇 년 전부터 비서실에 SNS 팀을 두고 창업주에 대한 신격화 동영상을 만들어 배포했다. 몇 번 봤는데, 프리랜서 경제 기자가 운영하는 것으로 위장했다. 전형적인 흑마술이었다.


"늦게나마 축하해요."


"미안해요. 나만 승진해서."


미안한 것까지야 있겠나, 싶었다. 멀쩡하게 길을 걷다가도 돌부리에 걸려 뒤로 넘어져 코가 깨진다고 하는데, 난데없이 닮은꼴 팀장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와 창고지기로 내쫓았으니, 딱 그 꼴이었다. 옆에서 걷던 사람이 나자빠진 사람한테 미안해할 필요가 있을까? 대신 꼬꾸라지지 않아서? 아무튼 내 손금이 거기까지라고, 내려놓을 것들은 일찌감치 탈탈 털었다. 오히려, 창고지기가 어때서? 자위하곤 했다. 여기 아니면 밥 벌어먹을 데가 없어서? 호기롭게 사표를 내던진 신입에 비하면 구차할지라도.


"그러면 내가 더 초라해지잖아요?"


"아니에요. 나도 얼마 전에 알았지만, 정말 미안해요."


"얼마 전에 알았다니요?"


의아했다. 창고지기로 전락한 지 일 년 몇 개월이 지났는데, 얼마 전에 알다니?


"내가 화성으로 내려온 것도 소문나지 않았어요? 잉여인간 취급하더니 내 흔적조차 입막음해요?"


"그런 게 아니라…, 지금은 말할 수…, 맞아요. 내가 무심했죠? 그래도 한때 사귀던 사이인데…, 장부와 수량이 같지요?"


황은 미안해하는 표정을 가라앉히고, 서둘러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적인 사이에서 느닷없이 공적인 사이로 바뀌었다. 기획팀 선배가 아니라, 화성 창고지기였다.


"약간 차이가 있을 겁니다. 오전에 출고한 물건은 아직 정리하지 않아서…, 보통 퇴근 전에 마감하죠. 그런데, 듣고 보니 좀 섭섭하네요. 더구나 사귀었던 사이라고 하니까."


새롭게 시작할 용기도 없지만, 황이 다시 사귀자고 할 것 같지도 않았다. 마음을 가늘게 떨리게 하는 감정은 오로지 내 몫이었다. 황은 장부와 팔레트 위에 쌓인 물건들을 건성건성 비교했다. 황의 뒤를 따라 창고 안을 한 바퀴 돌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치 보는 것은 아니지만, 대충 일하더라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듬성듬성 일할 거라면 평소처럼 검수팀을 보내지, 왜 비서실에서 왔을까?


"사무실 분위기는 어때요? 불편한 거, 없어요?"


황은 딱딱한 표정으로 물었다. 딱히 할 말이 없어 하는 사무적인 물음이었지만, 파트장의 비리를 까발릴까, 어쩔까, 망설였다. 곧이곧대로 일하는 내 품성을 알고 있으니, 효과는 금방 나타날지도 몰랐다. 하지만 파트장의 협박이 마음에 걸렸다. 예전 같으면 그따위 공갈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창고지기에 지나지 않나.


더구나 이 문제를 조용히 처리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다. 나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아닌가. 그래서 황을 포기하지 않았나. 양심선언의 유혹을 꾹꾹 눌렀다. 어쩌면 이 선택이 외지인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몰랐다.


"할만합니다."


"그래요? 그러네요."


황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전임자들이 내려왔다가 다시 본사로 올라가, 퇴직했다는 눈치의 얘기가 퍼뜩 떠올랐다. 지금에 만족해 다행이라는 뜻인지, 혹은 아직도 사무실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했냐는 실망감을 담은 것인지 아리송했다. 본사 비서실에서 사무실 분위기를 파악했다면. 취준생으로 면접관 앞에 앉아 있는 듯한 얄궂은 느낌이 들었다. 꺼림칙했다.


"그건 그렇고…, 보는 사람도 없는데, 손 한번 잡아요."


황은 슬그머니 손을 잡았다. 얼떨결에 손이 잡히자,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결별하기로 마음먹고, 무관심한 표정과 사무적인 말투로 차츰 거리를 두자, 황은 알딸딸한 상태의 충동적인 원나잇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 서먹서먹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급기야 조금씩 친밀감이 사라졌고, 원나잇은 둘만의 비밀로 굳어졌다. 진도가 더 나가지 않아서였다. 그러던 차에 닮은꼴 팀장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왔다.


"혹시라도…, 누가…, 볼 수도…."

이전 19화 그래서, 그는 자수성가했다. 12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