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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는 자수성가했다. 12

by 이순직 Jul 19. 2023

서둘러 손을 뺐다. 다시 사귀어보자는 황의 속내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만, 나는 어떤 준비도 없었다. 보육원 출신이라는 사실은 바위처럼 여전히 꼼짝달싹하지 않고, 여전히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평소에 의식하지 않았지만, 엇비슷한 처지끼리 만나야 하지 않나? 어느 한쪽이 기울면 반드시 불행해지는 끝을 숱하게 보지 않았던가. 미래에 대한 약속 없는 만남은 허공에 흩어지는 연기처럼 무의미했다. 시작이 실수였다면, 다시 시작은 자신에 대한 범죄였다. 잔인한 자학이었다.


"아무도 없는데, 보긴 누가 봐요? 손이 거칠어졌어. 하지 않던 일을 해서…."


황은 다시금 손을 잡고 조몰락거렸다.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당장 눈에 띄는 사람은 없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볼 수도 있었다. 사무실에 괜한 구설수가 퍼지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비서실 직원과 안면이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친분까지 있다고 알려지면, 지금껏 외지인 취급을 해왔는데, 180도 달라질 동료들의 태도가 마뜩잖았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들에 민감했다. 급기야 영혼까지도 헐값에 저당 잡히지 않는가.


"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손을 힘껏 빼며, 딱딱하게 말했다.


"동정하는 겁니까? 창고지기라고? 인연은 지난 일이잖습니까?"


나는 정색했다.


"풋! 자격지심이에요? 어울리지 않게."


황도 정색했다.


"지금은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어요. 모닥불이 꺼졌다고 생각했는데, 불씨는 사그라지지 않았다는 걸 발견할 때가 있잖아요? 전략기획팀도 많이 바뀌었어요. 일손이 부족하죠."


"네?"


날 완전히 개뼈다귀 취급이네. 말할 수 없는 것들이라니! 창고지기에 불과하니 말할 수 없다? 그러면서 기획팀으로 복귀의 가능성을 흘리는 짓은 또 뭐야? 진짜로, 눈치의 말처럼 다시 본사로? 닮은꼴 조 팀장의 밀정 노릇을 하던 황이 모닥불이니 불씨니 어쩌고 하면서 꼬리치는 이유가 있었네. 하지만 유혹이 전부일까? 다시 전략기획팀으로 자리를 옮긴다고 해도, 보육원 출신이라는 내 마음속 꼬리표는 지울 수 없지 않은가. 마치 천형과도 같은. 지금 황이 몰라서 꼬리치는 거지, 알고 나면 음색이 당연히 바뀌면서 얼굴색 또한 달라질 게 뻔했다. 누구나 상황이나 형편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태도를 바꾸지 않던가. 황도 예외는 아닐 터였다.


"여기까지 하죠. 처음 하는 일이라 서툴렀죠?"


황은 먼저 창고를 걸어 나갔다. 뒤따라 걷다 보니, 이상했다. 수상했다. 검수팀에서 해야 할 일을 비서실에서? 사무실에 한 명뿐이긴 하지만 검수 담당 동료가 있으니, 그 여직원과 소통하면 될 일을 굳이 나를 데리고 다니며 육안 검수를 할 필요가 있나?


"이것저것 도움이 됐어요. 또 만날 수 있으면 좋겠네요."


"파트장을 만나지 않고, 가려고요?"


"바로 간다고 얘기했어요. 또 봐요."


황은 차에 올라타면서, 손까지 흔들며 빙그레 웃었다. 잘 있으라는 뜻인지, 만나서 반가웠다는 의미인지, 불씨를 다시 살릴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웃음인지 알 수 없었다. 황이 떠나고, 사무실로 발길을 잡아 걸으면서, 도깨비나 헛것에 잠시 홀렸다는 야릇한 느낌에 휩싸였다. 본사 검수팀에서 나오지 않고 비서실의 황이 내려온 것이 좋은 징조인지, 아니면 기획팀에서 함께 근무하던 때와 달리 위아래가 역전된 현실을 보여주는 서글픈 반나절인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눈치가 예언했지만, 전략기획팀으로 복귀할 가능성을 설핏 보았다는 것. 돌아간다면 예언처럼 퇴직당하는 걸까? 기대보다 불안이 엄습했다.


"별다른 일은 없고? 잘 대처했나?"


파트장은 얼떨결에 하지 않던 반말을 했다. 조급함이 묻어났다. 내가 황과 같이 있던 동안, 내내 긴장하고 노심초사했던 걸까? 꼬리가 길면 언젠가, 반드시 밟힌다는 걸 알고 있겠지. 나는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소린 하지 않았지? 허튼 말!"


제 발은 확실히 저린가 보네. 하지만, 빼도 박도 못할 증거를 잡기 전에 폭로하면 오히려 역공당할 수도 있어. 본사 검수팀이 몇 년째 파트장의 농간을 눈치채지 못한 걸 보면, 장부에 잡히지 않는 물건이 분명하고, 사무실 차원에서 꼼수를 부린 게 아닐까? 모두가 공범? 납품처에 갑질했을 가능성이 커. 일반적으로 발주량보다 조금 더 납품하는 경우가 왕왕 있지만, 그런 차원을 훌쩍 뛰어넘어.


"내가 실수했네. 무의식중에 반말한 거니까, 마음에 두지 말아요."


"이상한 소리라뇨?"


"다 알면서 그러네요. 어린애도 아니니, 적절하게 처신했으리라 믿습니다.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죠. 좋은 게 좋다고, 좋게 좋게 넘어갑시다. 그나저나 꽤 미인이던데, 장대리에 호감도 있는 눈치고. 검수보다 장대리에 눈이 꽂혀 있던 것 같던데요?"


파트장의 눈에도 그게 보였나? 암튼, 얼렁뚱땅 은근슬쩍 넘어갈 속셈이구나. 하긴, 지금 여기서 말로 싸울 일이 아니지. 비리를 잡았다고 해도 터트리기 전까지 파트장은 변함없이 상사니까. 게다가 전임자들의 한결같은 퇴직이 자발적이라고 보기에는 뭔가 자연스럽지 않아. 일 년 넘도록 근무하면서 물류센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파악했지만, 사무실을 움직이는 내밀한 속사정은, 여전히 외지인 취급하는 탓인지 몰라도, 안갯속이야. 동료들 사이에 일종의 카르텔이라도 있는 걸까. 단순하게 파트장이 찍어누른다고 몇 년을 찍소리도 하지 않는 게 어디 말이나 돼? 볼멘소리조차 없잖아.


"본사에서 같이 근무했을 테니 당연히 서로 알고 있었죠? 젊은 처자와 피 끓는 총각 사이에 아무 일도 없다는 게, 정말 있을 수 있는 일인가요?"


파트장은 둘만의 비밀이라는 듯이 낮게 속삭였다. 평소에 카리스마도 있지만, 넘겨짚는 재주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나는 정색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파트장에게 황과의 원나잇의 밤들을 굳이 털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약점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았다. 설령, 본사 소식통에게서 몇 마디 흘려들었다고 해도,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믿어, 지레 겁을 집어먹는 모습 따위는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파트장은 미묘하게 조금씩 변하는 내 낯빛을 예리하게 눈여겨보았다. 기선제압의 습관이었다. 동료들이 파트장 앞에만 서면 주눅 들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쏘아보면서 넘겨짚으면 십중팔구 털어놓았다.


"피 끓는 총각이 한두 명인가요? 본사에."


"하, 그렇기도 하네요."


창고지기로 발령받아 출근하던 첫날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뻣뻣한 나를 파트장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눈빛으로 봐서, 성질 같아선 안다리 밭다리 걸기로 사정없이 패대기치고 싶다는 충동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었다. 확인할 수 없지만, 젊은 시절에 모래판을 들었다 놓았다고 했다는 과거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 누구의 과거도 궁금하지 않았다.


꼬박꼬박 말대꾸는…, 어쩌고 혼잣말을 입안에서 낮게 중얼거리며, 파트장은 사무실을 나갔다. 퇴근 전이면 으레 빼놓지 않는 창고 한 바퀴 돌기를 하려는 듯했다.


*


"아버지와 잘 지낸다는 얘기는 들었어."


지방 지사에 턱걸이로 취업하고 몇 달이 지나, 일이 손에 익어가던 무렵이었다. 도일은 말끔한 양복 차림에 얼굴은 지나칠 정도로 반들반들했다. 어디에서도 보육원 냄새는 나지 않았다.


"새장가 들어, 딸내미 둘을 낳았더라. 죽을죄를 지었다고, 꼴에 펑펑 울더라. 어떡하냐? 내가 불독도 아니고.


"잘 생각했어. 싫든 좋든 비빌 언덕이 생겼잖아?"


"비빌 언덕은 무슨 개뿔…, 복수는 살아있어, 아직, 마음속에."


"아버질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못할 것도 없지."


"아이고, 인생 참 더럽다!"


"취업했다고, 팔자 좋은 소리 하냐? 지금?"


도일은 장난스레 화를 내면서도 표정과 말투는 평화로웠다. 이제는 제법 살집이 붙어, 웬만한 돌개바람으론 끄떡도 하지 않을 듯했다. 아버지와 관계가 어떻든, 도일은 보육원의 기억에서 벗어나 나름 제 삶을 살고 있다고 추측했다. 다만,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었다. 첫눈이 내리면 데리러 온다고 약속했단 말이야! 지금도 보육원 도일의 울먹이는 외침이 귓가에 생생했다.


한 주먹거리도 안되는 놈이 질질 짜기는! 불독은 윽박질렀다. 진짜란 말이야! 약속했단 말이야! 도일은 아버지가 데리러 오는 날, 반드시 앙갚음하겠다는 듯이 소리쳤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아버지가 그렇게 단순하게 보이냐? 세상은 복잡해. 살벌하다고. 진실을 얘기해 줄까? 보육원에 첫눈이 와도, 포항엔 내리지 않아? 무슨 뜻인 줄 알아? 불독은 확신했다. 잔말 말고, 가진 돈 다 내놔! 불독은 어린애처럼 질질 짜는 도일을 걷어찼다. 백호 너도! 그해 초겨울 저녁, 먹장구름이 널빤지처럼 두툼하게 깔리다가 희끗희끗 짧은 첫눈이 내렸지만, 포항은 끝내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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