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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는 자수성가했다. 14

by 이순직 Jul 21. 2023

눈치가 거들었다. 대체 어디까지 뒷조사를 한 거야? 무서운 사람들이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고, 틀린 말이 아니네요."


눈치가 에둘러 말했지만, 영락없이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일어나선 안 될 일이 일어났으니 당연히 분개하고, 억울함을 이제라도 하소연하라는 투였다. 일 년도 훨씬 지난 일들을, 아무 상관도 없는 파트장에게?


"물건 빼돌리는 도둑질을 눈감아 달라는 얘길 하고 싶나요?"


"도둑질이라니!"


파트장은 얼굴을 벌겋게 붉히면서 벌컥 화를 냈다.


"그건 아니죠. 장부에도 없는 물건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눈치가 덧붙였다.


"아니면, 횡령인가요?"


세게 나갔다. 그렇지 않아도 외지인 취급받는데, 잃을 것도 없었다. 전략기획팀으로 복귀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파트장과 한통속으로 묶이기 싫었다. 지금까지의 나와 다른 내가 된다는 것은 생각조차 꺼림직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 파트장과 날을 세워봤자 득이 될 게 없다는 추측도 들었다. 시쳇말로 좋은 게 좋을지도 몰랐다.


"지금까지 일은 비밀로 하죠. 단, 앞으로 더는 도둑질하지 않는다면."


흔들리는 마음과 달리 말은 단호하게 했다. 파트장은 미간을 힘껏 찡그렸다.


"혹시라도 비서실에서 나온 사람한테서 무슨 얘길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장백호 씨! 끈 떨어졌어요. 그나마 여기서 직장생활 편하게 할 작정이라면 생각을 고쳐먹는 게 좋을 거요."


파트장은 정색하며 으름장을 놓았다.


"사회생활 하루 이틀 합니까? 알만한 사람이 왜 이래요?"


눈치는 예상과 달리 확실히 엇나간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도둑이나 횡령은 빌어먹을 자본가 놈들이나 쓰는 말이지요."


파트장은 머릿속을 마구 헤집어놓을 작정인지, 냉소적인 미소를 섞어 말했다.


이건 또 무슨 풀 뜯어먹는 소리야? 여기서 왜 뜬금없이 자본가가 나와? 길바닥에서 몇 마디를 어설프게 주워들은 모양인데, 불독의 수작질과 완전히 판박이네? 하여튼 자기합리화는 어떻게든 한다니까! 누구나!


"우리 같은 사람들은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도 없이 혹독한 부림만 당하다가, 쓰레기처럼 버려진다는 것쯤은 알고 있잖소? 노동자가 자본가의 논리를 따라갈 필요가 없지요. 따라간다고 해서 자본가가 되는 것도 아니고."


"맞습니다. 본사로 올라가면…, 어차피 그 뒷일은 불 보듯 뻔한데."


눈치가 나를 쏘아보며 재빠르게 덧붙였다. 눈치의 예언이 실현될지 두고 보면 알 터이고, 둘이 하나를 바보로 만드는 기막힌 작당은 정말이지 놀랍지도 않았다.


"협박인가요? 아니면 유혹?"


당장만 생각하면 앞뒤 없이 유혹을 덜컥 물었겠지만, 사회생활 6년 차가 아닌가. 게다가 산전수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수없이 당했던 불독을 경험하지 않았나. 선뜻 내키지 않으나, 막다른 골목이라면 몸값 올리는 계산기라도 두드려야 했다.


"우리 편에 선다면, 자본가는 될 수 없어도 보상은 짭짤하지요. 막말로 장대리가 처음도 아니고. 앞으로 결혼하려면 목돈이 필요할 텐데."


"전셋집은 마련해야…, 본사에서 쫓겨나 급여도 반토막 났을 테고…, 코인 투자는 하지 않았을 테고."


눈치는 맞장구쳤다. 돈 얘기가 나오자 목부터 잠겨왔다. 취업하기 전에, 오늘이 마지막이라며 열심히 살아도 잠들기 전에는 어김없이 아침이 두려웠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뛰어난 풍경도 허기진 눈빛 안으로 들어오지 않을 터, 마음이 조금씩 흔들렸다.


"본사에서 쫓겨났으니 억울하고…, 다시 올라간다고 해도 끝은 빤하고…."


눈치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처음에 눈 한번 질끈 감는 게 어렵지, 곧 익숙해집니다. 그리고 이거, 받아둬요."


파트장은 느닷없이 두툼한 봉투를 내밀었다.


"회사에선 주지 못하는 보너스라고 생각해요. 석 달에 한 번은 꾸준히 나오는. 그럼, 내일부터 자네가 장백호 씨한테 일을 나눠주면 되겠네."


파트장은 눈치를 보며 한결 홀가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딱 부러지게 같은 편에 선다고 말하지 않았는데도, 이미 얘기는 끝났다는 식이었다. 얼렁뚱땅 슬그머니 넘어간다고 느끼면서도 봉투에 대한 거부감은 놀랍도록 없었다. 창고지기로 지내면서 자신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변해버린 자신이 그다지 싫지 않았다. 눈치의 말마따나 교과서를 고집하다가, 날카로운 발길에 이리저리 차이기만 할 뿐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부모보다 닮은꼴 조 팀장이 원망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부담감은 줄어들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니까. 그럼, 휴일 잘 보내시고, 월요일에 봅시다."


파트장은 꽤나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파트장이 자리를 뜨고, 눈치는 비로소 동료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그동안 내가 좀 무뚝뚝했죠?"


라고 말했다.


"사정이 있었을 테니까요."


나를 외지인 취급한 것은 눈치의 의지가 아니라는 뜻으로 말했다. 눈치의 표정이나 말투 어디에서도 외지인을 대하는 낌새는 전혀 없었다.


"솔직한 얘기로 어쩔 수 없었죠. 본사 출신이라 당연히 의심했고, 인간적으로 다가서는 것도 어려웠죠. 이제 비로소 진짜 동료가 됐으니 마음이 홀가분해서 한시름 놓았습니다."


"그런데, 장부에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이죠?"


"물건이요? 그게 좀 복잡한데, 나도 정확하게 아는 건 아니고…, 그러니까, 거래처에서 장부보다 조금 더 들어온다는 것 정도…, 깊게 알려고 하지 마세요. 골치 아프잖아요? 다칠 수도 있고요. 창고에 받아놨다가 파트장의 지시에 따라 출고하면 끝입니다."


"거래처에서 과잉 납품을 한다는 겁니까?"


"과잉까지는 아니고…, 인사치레로 쪼금 더 자주? 그리고, 돌려막기라고 할까요? 이쪽 빼서 저쪽 맞추고. 전체적인 흐름은 파트장만 알고 있으니까. 사실, 조금 전에 받은 봉투도 파트장에겐 껌값일걸요. 신통방통한 건 계속 들통나지 않았다는 사실이죠. 본사 감사도 여러 번 받았지만. 내 알 바 아니죠. 공돈만 챙기면 그만이니까."


"뒤탈이 없을까요?"


"있겠죠. 언젠가. 하지만, 그런 날이 올까 싶네요. 얼핏 듣기로, 파트장도 전임 파트장한테서 물려받은 거라고. 관행이라고 하더라고요."


"들통나더라도 파트장만 당한다는 얘긴가요?"


"그렇죠. 그러니까, 깊게 알려고 하지도 마세요. 파트장이 시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니까요."


떨어지는 콩고물이나 주워 먹으면서, 침묵했을 뿐이라고 오리발 내밀겠다는 거네. 관행이라는 튼튼한 방어막도 있겠다, 눈치 혼자도 아니고 사무실 동료 모두가 한통속으로 볼 수 있으니 덤터기 쓸 일도 없겠다, 아주 꽃길만 걷겠다는 거구나. 그렇다면 나도? 기획팀에서 퇴출당한 마당에 물불 가릴 필요가 있을까? 양심에 찔리는 구석이 없지 않지만, 몇 년 동안 기획팀 대리로 있으면서 충성한 대가가 겨우 창고지기라니! 지금껏 만났던 사람 중에서 눈치만큼 상황 판단이 빠른 이는 보지 못했으니 일단, 믿어봐? 봉투까지 받았으니 믿고 말고가 뭐 있나? 이미 내 손을 떠난 문제가 아닌가. 얼떨결에 상황 끝이네.


"그런데, 급여 통장에 다달이 찍히는 건 뭐죠?"


"아, 그거요? 올가미죠."


눈치는 대수롭지 않다는 목소리였다. 먼저 올가미를 걸어놓고 간을 본 다음에, 넘어올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지금처럼 봉투를 내미는 전술이네. 그동안 얼마나 나를 연구했을까. 출근한 아침부터 퇴근하는 저녁까지 수시로 관찰하고, 추측하고, 궁리했겠지. 어쩌면 사소한 표정 변화까지도 눈여겨봤겠지. 파트장과 눈치가 머리를 맞대고서 다양한 시나리오를 짰을지도 모르지. 도둑질도 머리가 좋아야 한다던데, 허투루 들을 말이 아니야.


"이제는 통장이 아니라, 현금 박치깁니다. 이 봉투처럼요. 빌어먹을 페니 코인이 떡락하는 바람에 1억 넘게 몽땅 날려 먹어, 죽을 맛으로 살았죠. 지금은 테스 코인에 투자하죠."


눈치는 스스럼없이 개인사를 얘기했다. 잠바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힐끗 꺼내 보였다.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고 난 뒤, 포만감에 짓는 세상 부러운 것 없다는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언젠가 테스 코인이 떡상할 거라는 믿음이 엿보였다. 투자는 투기의 다른 이름이며, 투기는 도박의 형제라는 걸 모르나? 그 얼굴에서 역겨움을 느낀 것은 단지 기분 탓일까? 싸구려로 삶을 산다는 눈치에 대한 평가가 너무 혹독하나? 코인에 대한 믿음이 어지간하네?


"언젠가 떡상할 겁니다. 비트코인처럼 테스 코인도요.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라, 이쯤에서 퇴장합니다. 그리고, 꼭 기억하세요.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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