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쓸데없고 어이없는 짓이었다. 원생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서 고아가 아닌 것은 아니었다. 원생이라면 꿈도 꾸지 못하는 대학생이라는 허울에 헛헛한 바람만 가득한 객기를 부렸던 것은 아닐까. 원장의 음흉한 뒷바라지를 남몰래 받으면서. 취업에 연이어 실패하자, 원장이 더는 찾지 않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몸보다 마음이 녹초가 되어서 오피스텔 원룸으로 돌아왔다. 각성까지는 아니더라도 변해야 한다는 생각에 골몰했다. 불독처럼 남을 속이고 폭력으로 짓밟으면서, 어떻게든 생존을 이어가려는 비열한 전투력은 아니더라도, 선량한 사마리아인으로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집중했다. 딱히 모아둔 목돈도 없으니 창고지기 자리에서 미끄러지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비서실로 승진한 황이 전략기획팀으로 복귀할지도 모른다는 뉘앙스를 던졌으나, 닮은꼴 조 팀장의 밀정 노릇을 했던 터라, 믿을 수 없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느닷없이 의문점 하나가 떠올랐다. 대체, 무엇 때문에, 닮은꼴 조 팀장은 나를 싫어했을까? 개인적인 악감정을 가질 만큼 서로 부딪친 적도 없는데, 업무에서 실수나 사고를 친 것도 아닌데, 저성과자로 내몰면서, 잡아먹지 못해서 혈안이었던 걸까. 도대체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아무튼 지금은 나부터 살고 봐야지. 파트장에게 어깃장을 놓았다간 죽도 밥도 아닌 꼴이 되어버려. 하지만 잠입 수사하는 형사처럼 행동해야 한다. 만에 하나, 기획팀으로 복귀하면 파트장의 비리는 한밑천이 될 수도 있으니.
*
"좋은 아침입니다!"
파트장은 사무실로 들어서면서 외쳤다. 입출고 목록과 수량을 점검하는 간단한 아침 회의가 끝나자 눈치와 함께 사무실을 나왔다. 다른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같은 편임에도 여전히 외지인 취급하는 동료들의 까칠한 눈길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앞에 대놓고 비로소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우스웠다. 어쩌면 지난 일 년 동안 내 앞에 쌓아놓은 거대한 벽을 쉽게 무너뜨리기 어려울지도 몰랐다.
"어째, 사무실 분위기가 싸하네요."
"네?"
눈치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이제 한몫 끼게 되었으니…."
"그 얘기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의기투합하는 것도 아니고, 알고도 모른 척하는 게 서로에게 좋잖아요? 그리고 다들 알고 있는 사실들도 조금씩 다르고."
"그래요?"
"함께 일하지만, 일종의 점조직처럼 서로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몰라요. 나 역시 마찬가지지만. 팁 하나를 주자면 침묵은 돈이다, 우리 경우에는요."
"우리 경우요?"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라서요. 이렇게 비유하니까, 더 헷갈릴 수도 있지만, 차차 알게 됩니다. 분명히 짜고 치는데,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다! 이상하죠? 이상해야 돈맛을 볼 수 있어요."
눈치의 말을 들어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하고, 완전히 헛다리 짚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니, 눈에 띄게 설레발치면서 비리의 내막을 파악하려 한다는 인상을 심어줄 필요는 없었다. 조용히, 말없이 침묵하면서 마지못해 동조하는 그 이상일 필요는 없었다. 눈치처럼.
"혹시 물건 빼러 온 사람이 전임자일 수도 있어요. 보통은 아니지만."
"전임자라면…?"
"본사로 올라갔다가 권고사직 당한 사람이요. 설령 아는 사람이더라도 모른 척하세요. 그러면 더 이상하려나? 날씨 얘기나, 대충 그런 얘길 하면 되겠죠."
"그래야 하나요? 꼭?"
"좀 꺼림칙하잖아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알면 서로 거북하고 어색하겠죠. 알아도 모르는 채 그냥저냥 넘어가는 동문서답이 최고죠."
그쯤은 나도 알지만, 순진한 표정은 풀지 않았다. 지나친 호기심은 오히려 의심을 살 수 있었다. 작은 의심이 의혹으로 번져가고, 급기야 은밀한 속내를 들킬 가능성도 있었다.
"본사에서 책상머리에 앉아만 있으니, 필드는 몰라요. 책상 위 서류처럼 세상일이 그렇게 돌아가나요, 어디?"
눈치는 비로소 창고지기 선임 노릇을 한다는 말투였다. 어깨까지 으쓱거리며 자신만만해했다. 당연히 책상 앞에 앉아 펜대만 굴리는 먹물쟁이에 대한 혐오감을 느낄 수 있었지만, 눈치의 말처럼 모른 척 넘어갔다. 누군들 자신의 판단을 절대선이라고 믿지 않으랴. 성향에 따라 조금씩 다르나, 가방끈 긴 놈들만큼 세상을 약삭빠르게 사는 이는 없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전략기획팀에서 내 옆자리에 앉은 박 주임만 해도 닮은꼴 조 팀장 옆에 바싹 붙어 온갖 손발 노릇을 하지 않았던가. 물론 황도 마찬가지지만.
"맞는 말입니다. 그렇고 말고요!"
맞장구쳤다. 자신의 판단을 맹신할수록 시야가 좁아져, 내내 우물 안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부류일수록 자신의 판단에 딴지 거는 사람을 병적으로 싫어하고 미워했다. 나 역시 얼마 전까지 마찬가지였다. 마리오네트로 이용당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원장에 대한 고마운 감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으니. 눈치는 매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전략기획팀에 있었으니, 나보다 더 잘 알겠죠. 그렇죠? 내 말이 맞죠?"
눈치는 자신의 판단이 틀림없다며 확인 도장이라도 받겠다는 투로 물었다. 정말이지, 지금껏 눈치를 겪었던 바와 달리 의외로 단순해. 같은 편이라는 안도감에 거리낌 없이 속내를 드러내. 페니 코인에 투자해 망했다는 말까지 했으니.
"그럼요!"
눈치는 대화를 나누면서 상대의 머릿속을 대충이라도 짐작하지 않았다. 귀찮은 걸까?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단순하게 살아가는 것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을 터,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가 단순할수록 맞상대하기 편하긴 하지. 적당하게 비위를 맞춰주면서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겠지.
오후 늦게 낯선 트럭이 창고 앞에 멈춰 섰다. 트럭 조수석에서 내린 잠바가 곧장 사무실로 걸어갔다. 제법 먼 발치에서 얼핏 보긴 했어도 단박에 눈에 익었다. 통성명까지 하지 않았어도 본사 출근길에서 자주 보던 남자가 분명했다. 눈치가 말하던 전임자인가?
"안녕하슈?"
구레나룻 트럭 기사가 창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이미 왔던 기사들은 굳이 창고 사무실로 들어오지 않았다. 좁은데다 쉴만한 의자조차 없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대기업 물류단지가 다르긴 다르네요. 그런데 이 방은 좀 거시기하네…."
구레나룻은 창고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혀를 끌끌 차며 너스레를 떨었다. 있는 거라곤 그 흔한 컴퓨터조차 없이, 달랑 작은 책상에 의자 하나뿐이니 그럴 만도 했다. 입출고는 수기로 작성해 사무실로 올라가 검수 담당에게 건네는 시스템이었다. 말이 검수 담당이지, 각각의 창고지기가 작성한 수기를 취합하는 것뿐이었다. 당연히 교차 검수 따위는 없었다. 창고로 내려오기 전에 검수 담당으로부터 받는 리스트에서 입출고를 추가하거나 빼기만 했다. 물론 검수는 아침과 퇴근 전에 하지만, 파트장의 비리를 알고 나서 대충 눈도장만 찍었었다. 열심히 일할 필요도 없고 그럴 환경도 아니었다. 동네 구멍가게마저도 재고관리를 철저히 하지만.
"그런가요?"
말대꾸에 말이 통한다고 여겼는지 구레나룻은 빙그레 웃었다.
"물 한 잔 얻어먹으려고 했더니만…, 그런데 창고가 크긴 크네요."
구레나룻은 작은 창문으로 창고 안을 살피며 혀를 내둘렀다.
"없는 거, 빼고 다 있겠네요? 대기업이니까."
"뭐, 대충…, 웬만한 것은…."
"이러니 대기업이 싹쓸이하는 거지. 그렇지 않아요? 아무튼 돈이 돈을 번다니까. 없는 사람은 죽어나고…. 쥐구멍에 볕 든다는 말도 옛말이 됐어요."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신세 한탄을 하나? 듣기가 거북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한테? 맞장구치기가 마뜩잖았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어서가 아니라, 헐벗음을 당연한 운명처럼 여겼던 보육원 시절의 날들이 떠올랐다. 사는 형편이야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낫지만, 그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자유로울 수 없었다.
지금까지 열이면 열 모두 당연한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맞장구쳤는지 몰라도,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자, 구레나룻은 뻘쭘해졌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좁은 공간이라 무척 거북했다.
"어디서 왔어요?"
"출발지요? 차고지요?"
구레나룻은 대뜸 말했다.
"어느 쪽이든…."
"차고지는 동두천이고, 의정부에서 출발했죠."
"무슨 차이죠?"
"말 그대로 차고지는 동두천이고, 화주는 의정부에 있다는 거죠. 요즘 일거리 잡기 워낙 힘들어서요. 동두천에서 의정부까지는 공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