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해네요."
"그 정도는 약괍니다. 부산까지 공차인 적도 있는데요. 동두천에 염색공장이 꽤 있는데, 그날따라 화물이 없는 겁니다. 부산에선 그날 아니면 안 된다고 하고. 환장할 노릇이죠. 하지만 어떡합니까? 또 놀면 뭐 합니까? 가뜩이나 없는 돈 축내죠. 그런 날이 부지기숩니다. 그런데 돈이 돈을 버니, 나처럼 화물차로 돈 버는 것하곤 비교조차 할 수 없죠. 안 그래요? 아무튼 정치하는 놈들, 염라대왕이 왜 불러들이지 않는지, 몰라."
구레나룻은 울화통이 터지는 표정을 지었다. 멀리, 사무실에서 걸어오는 파트장과 잠바가 보였다.
"빨리 상차해야, 해 떨어지기 전에 도착할 텐데…."
구레나룻은 혼잣말로 투덜거리며 창고 사무실을 나갔다. 뒤따라 나가며 혹시나 해서 입출고 서류를 다시 훑어보았다. 출고해야 할 품목은 이미 출고 완료였다. 눈치가 지게차를 끌고 왔다.
"장대리, 김 사장이야. 앞으로 김 사장이 직접 출고할 거야. 나와 얘기가 끝났으니 그렇게 알고, 서로 인사나 하지?"
잠바가 손을 내밀었다. 딱히 꼬집어 짚을 수 없어도, 왠지 눈에 익은 얼굴이라는 느낌이 확 다가오는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다가,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라며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입가에 알 듯 모를 듯 야릇한 미소를 어색하게 지었다. 속으로 짐작하고도 은근슬쩍 뭉개는구나. 하긴, 잠바 먼저 굳이 아는 체를 하며 호들갑 떨 필요는 없겠지.
"저도 잘 부탁합니다."
가볍게 악수하며 기억의 갈피를 뒤적거렸다. 그러나 본사 어디에서 잠바를 만났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업무상 교류가 없으면 모르는 게 정상이었다. 잠바는 기획팀 소속이었던 나를 알 테지만. 파트장은 눈치가 D-12에서 23까지의 물건을 지게차로 상차하는 걸을 보고서야 사무실로 돌아갔다.
"부지런히 가야겠어요. 벌써 노을이 피네. 기회가 되면 또 봅시다!"
구레나룻이 운전석에 앉아 손을 흔들었다.
"우리도 슬슬 퇴근 준비나 하죠."
눈치가 지게차에 앉아 소리쳤다. 떨리거나 긴장조차 하지 않은 나 자신이 의외였다. 익숙한 장소이기도 하고 멀거니 쳐다보기만 했지, 딱히 가담하지 않은 탓에 죄책감이나 불안감 따위는 없었다. 솔직히,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판단이 들었다. 파트장이 다음부터 직접 잠바를 상대하라는 언질은 발을 빼고 싶어도 뺄 수 없다는 다른 말이었다.
퇴근 준비를 위해 사무실로 걸어갔다. 애타게 기대하지 않았지만, 석 달이 지나도록 전략기획팀으로 복귀하라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본사로 돌아갈 거라는 눈치의 예언이 느닷없이 떠오를 때마다 눈 한번 딱 감고 전화라도 해볼까, 싶었지만, 황을 사적으로 만나면, 괜한 오해를 살 우려가 있었다. 창고에서 덥석 손잡는 속내가, 여전히 의뭉스러웠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지 않을까. 그녀와의 관계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쯤은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감정적인 문제는 둘째치고, 무엇보다 그녀는 회장 늙은이의 비서실에 근무하고, 나는 한낱 창고지기에 지나지 않았다. 한때 같은 공간에서 일하던 동료라고 할지라도 지금은 하늘과 땅이었다.
*
"어떻게 지냈어?"
도일을 만난 것은 늦은 휴일 오후였다.
"얼굴이 많이 상했네. 무슨 일이 있긴 있었어. 말해봐! 형님이 해결해줄 테니. 노총각 연애?"
도일은 싱겁게 웃었다.
"사람 장사하더니, 넘겨짚는 건 고단수네?"
"널 아니까. 나라도 제각각 다른 동남아 애들을 뒷조사하는 것에 비하면 껌이지."
"취업하러 온 사람들을 뒷조사까지 한다고?"
"자세히 말할 순 없지만, 이런저런 선이 있지. 근무지에서 이탈하면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거든. 그건 그렇고, 나처럼 별 볼 일 없는 놈이야 연애 걱정하지, 너처럼 대기업의 두뇌라고 할 수 있는 전략기획팀에 근무하는 놈이, 그깟 여자 걱정을 해?"
도일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사실은 쫓겨났어."
"뭐?"
도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고개까지 갸우뚱거렸다. 언제까지 침묵할 수 없었다. 만나자마자 대뜸 얼굴이 상했네, 어쩌네, 넘겨짚는 걸로 봐서 숨겨서 얼렁뚱땅 넘어갈 일도 아니었다. 언제가 밝혀질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한솥밥 먹은, 피보다 진한 형제애가 깨졌다며 볼멘소리를 늘어놓는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말로 드러내고 싶지 않은 모양이지만, 도일에게 나는 자랑거리였다.
"전략기획팀에서 쫓겨났다는 거야? 우리 중에서 제일 잘 나가던 네가? 농담이지?"
"벌써 2년이 되어가."
"정말이야? 그럼, 지금은?"
"계열사이긴 하지만, 화성에 있는 물류센터에서 근무해. 창고지기야."
도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에서 어이없음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헛헛한 얼굴로 바뀌었다. 하늘이 무너지면 믿겠지만, 내 친구 백호가 구렁텅이로 빠졌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데? 그런 표정이었다.
"어쩌다가? 너처럼 꼼꼼하고 신중한 성격이 일 처리를 엉터리로 했을 리도 없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속으로 끙끙 앓지 말고 털어놔."
안쓰러움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도플갱어라고 들어봤어?"
"엇비슷하게 생긴 사람?"
"목소리마저 비슷하더라고."
"누가?"
"낙하산을 타고 기획팀으로 내려온 팀장이 나와 닮은꼴이었어. 거울을 보는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성격이 꼬장꼬장해서, 견디지 못한 신입이 그만두자, 화살이 나한테로 왔지."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팀장이 콕 찍어서 쫓아낸 거네! 그 자식 심보가 엄청나게 뒤틀렸네. 그나저나 닮은꼴이라면 혹시…?"
"출생의 비밀, 뭐 그런 거, 아니냐고?"
"혹시 모르잖아. 쌍둥이일지도. 부모님을 찾고 싶어 했잖아?"
도일의 눈빛이 반짝였다. 외롭고 가난한 삶이 맞이하는 반전의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한껏 섞인 눈빛이었다.
"아니야. 처음엔 나도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했지만?"
"아니었어."
도일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소리야? 정황상 쌍둥이야.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닮은꼴이겠어?"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불행하게도 일치하지 않았어."
"뭐가 일치하지 않아? 도플갱어라며? 하다못해 목소리마저 같다며?"
도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는 아직 찾지 못했지만, 비록 격렬하게 미워하나, 자신만 아버지를 만났다는 미안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니라니까!"
단호하게 말했다.
"확실해? 팀장과 진지하게 얘기해봤어?"
"실은, 팀장이 모르게 유전자 비교검사를 했어. 일치하지 않더라."
"그래?"
도일은 미간을 찡그렸다. 어깨가 축 늘어지고,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한동안 말없이 통유리 밖,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일의 실망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역시 검사 결과지를 받아 들고, 너무나도 뚜렷한 확신에 가까운 희망이긴 했으나,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에 휩싸여 며칠을 허우적거렸다. 신은 나를 버렸으며, 결코 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어쭙잖은 생각에 골몰하기도 했다.
"그 자식! 참 나쁜 놈이네! 도플갱어라고 기획실에서 쫓아내다니! 너도 참 순진하다. 쫓아낸다고 쫓겨나냐? 머리로 받아버리지! 생각할수록 괘씸하네! 나 같으면 가만두지 않는다!"
도일은 뒤늦게 미안한지, 벌컥 화를 냈다.
"창고지기도 할만해. 돌아가는 시스템이 기획실과 딴판이긴 하지만."
도일은 여전히 화를 멈추지 않고 씩씩거렸다.
"알량한 창고지기 하려고, 그냥 넘어갔나? 그것마저 빼앗길까 봐? 밤길에 뒤통수 조심하라고 말도 못 하고? 너도 참, 어지간하다. 내가 앙갚음해주랴?"
"앙갚음은 무슨…, 다 지난 일인데."
"제발, 순둥이처럼 굴지 마라. 그 자리에 올라가려고 얼마나 노력했냐? 밤잠 설쳐가며!"
화가 분노로 바뀌고 있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탁자를 내리쳤다. 화들짝 놀랐다. 예전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불독에게 당하고 난 뒤, 열패감으로 뒤덮여 있던 얼굴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 장사하더니 많이 변했네.
"언제까지 당하고만 살 거냐? 지겹지도 않냐?"
"세상 돌아가는 일이 어디 내 맘대로 되냐?"
"그걸 지금 핑계라고 하냐?"
"핑계고 뭐고, 사실이잖아? 보육원 출신들은 뒷배경이 없어, 당해도 찍소리조차 낼 수 없는 걸 너도 잘 알 테고."
"불독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떠들었던 얘기를 잊었냐? 기억나지 않아?"
도일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사자는 물론이고, 덩치가 큰 놈들은 생식기부터 물어뜯는 하이에나처럼 살아야 한다고. 강자 앞에선 비위를 맞춰주며 호시탐탐 판세를 뒤엎을 기회를 엿보고, 약자 앞에서 강해야 한다고. 원장에 대한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앞뒤가 완전히 달라야 해. 선한 척하면서 뒤로는 더없이 악독해야 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