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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는 자수성가했다. 18

by 이순직 Jul 26. 2023

녀석은 마디마디에 힘을 주었다. 보육원 원장의 이중생활이 소문으로 퍼진 모양이었다. 선으로 위장한 탐욕의 실체가 드러났으니, 그렇지 않아도 불만을 가졌던 원생들 사이에서 원성이 자자할 만도 했다. 불독은 물론이고 도일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너 많이 변했다."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보자,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섬뜩했다. 마치 원장에 대한 분노가 팀장에게로 전이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회생활 해봤잖아? 세상 살아봤잖아? 녹록한 게 하나라도 있더냐? 뚫고 가려면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는 걸 반드시 보여줄 필요가 있어! 닮은꼴이라고 했지?"


"무슨 뻘짓을 하려고? 아서라. 네가 불독이라도 되냐?"


"불독 이상이지."


히죽 웃는 도일의 엷은 웃음이 서늘했다. 아무리 성깔이 변했다고 해도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고 믿어, 술기운에 하는 말이라고 귀 밖으로 흘렸다. 밤은 깊어 갔고, 옛날처럼 어깨동무하며, 오피스텔 원룸으로 돌아와 정신을 잃을 때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술기운이 가시면 쏟아냈던 말들을 기억하지 못할 거라 여겼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온다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진 도일이 약간 걱정스러웠다.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닌데, 설마 사고 치겠어?


*


늦은 오후가 되어서 동네 산책하러 나섰다. 일요일이라, 동네는 시끌벅적했다. 딱히 목적지도 없이 이리저리 발길 닿는 데로 걷다가 골목 초입에 멈춰 섰다. 몇 달 동안 틈만 나면 찾으려고 했던 수상한 솟을대문이 저만치 보였다. 여전히 고풍스러웠다. 담벼락에 그려진 만(卍)자도 보였다. 슬금슬금 골목 안으로 들어가 걷는데, 대문이 열리고 백발에 수염 성성한 할아버지가 나왔다."


"저 누군지 아세요?"


"글쎄…, 뉘신가?"


노인은 나를 한참 쳐다보았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눈빛은 익히 알고 있다는 투였다.


"여기…, 꼬마가 살고 있죠? 몇 달 전에 만났었는데…."


말끝을 흐렸다. 누군지 모른다고 시치미를 딱 잡아떼는데,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꼬마라니? 그런 애는 없는데."


그날, 분명히, 대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노인은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했다. 멀쩡한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눈빛과 표정이 따로 노는 기묘한 상황이 어처구니없었다. 치매기가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지나가는 나그넨가?"


풍성한 흰 수염이 엷은 골목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나그네>란 옛말이 귓바퀴에 달라붙어 기분이 묘했다.


"지나가는 길이긴 한데…."


"갈 길이 멀수록 쉬어가란 말이 있지. 들어오게. 차나 한잔 대접하지."


가타부타 대답도 듣지 않고 노인은 뒤돌아 대문을 열었다. 꼬마가 대문 안으로 들어갈 때 보았던 희뿌연 안개 같은 것이 거대한 천처럼 눈앞에 나타났다. 노인을 따라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금방 뒤따라 들어섰는데도 노인의 등이 흐릿해졌다. 등 뒤로 삐거억, 삐거덕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없었는데, 고풍스럽고 육중한 대문이 닫히는 소리였다. 소리에 놀라 뒤돌아보다가, 다시 노인을 찾았다. 여전히 흐린 등만 얼핏 보였다. 순간적인 느낌이었지만, 길을 잃은 듯한 황망함이 밀려왔다.


서둘러 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분명 노인의 등을 향해 걸었는데도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 걸까? 한참을 걸어가도 노인과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축지법이라도 쓰는 걸까? 갑자기 목마름이 치밀어올랐다. 허겁지겁 내달리다시피 재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제야 흐릿한 안개 너머에 넓은 대청마루가 보였다. 몇 걸음 더 걷자, 눈앞으로 연신 가로막던 안개 같은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거참, 희한하네. 동네에 이런 집이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안개도 아니고 연기도 아닌 것들이 대체 무엇일까?


"어서 올라오게나."


대청마루에 꼿꼿한 자세로 앉은 노인이 보였다. 대청마루에 올라서자, 비로소 마당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골목에서 담장의 길이를 눈대중으로 짐작했을 때와 달리 마당은 생각보다 넓었다. 마당 한쪽엔 작지 않은 연못에, 정자까지 있었다. 처마 끝에서 풍경소리가 들려왔다. 점집이라는 선입관에 무속인이 살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전통적인 한옥이었다. 사랑채와 행랑채도 있었다.


"앉지 않고 뭐해?"


"밖에서 볼 때, 이렇게 넓지 않았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교자상 앞에 앉았다. 다기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노인은 차호에서 찻잎을 꺼내 다관에 넣었다.


"특별한 녹차로 준비했으니, 거부감은 없을 거네."


노인은 다관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마치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투네? 머릿속이 빠르게 움직였다. 대체 뭐 하는 노인이야? 물음표가 느닷없이 치솟았다. 불과 몇 분 전에 서 있었던 골목과 완전히 다른 세상에 들어온 느낌에 휩싸였다. 사랑채나 행랑채, 넓은 마당 어디에서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쥐새끼 한 마리 없어. 하다못해 골목에서 들려오는 소음조차 없어. 가는 바람에도 흔들리는 풍경소리만 있어.


"들게."


노인은 찻잔을 내 앞으로 밀었다. 커피에 익숙해진 입맛이라 녹차는 밍밍했다. 노인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치 내 속을 환히 꿰뚫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보육원의 어린 시절까지 낱낱이 발가벗겨지고 있다는 이상한 느낌이었다.


"기억하시죠? 저를."


"차나 마저 들게."


뭐야? 허튼소리 하지 말라는 표정이네. 대체 무슨 꿍꿍이야? 내가 올 거란 걸 빤히 알고서 차까지 준비하고, 시간 맞춰 대문 밖으로 나왔다는 것쯤은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데. 얍삽하게 선택적 치매인가? 아니면 정작 중요한 것을 내가 놓치고 있나? 노인은 깊은 생각에 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나, 천천히 가로 저었다.


"예전에 저한테 주신 게 있는데, 그게 말입니다…, 도통 뭔지 모르겠어요."


"아직 때가 아니야."


"때요?"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때라니? 어느 때?


"저길 봐. 소나무 위, 저 황새."


노인은 마당 정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정자 옆에, 아까는 분명히 없었던 노송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리고 황새 한 마리. 금방이라도 커다란 날개를 활짝 펼쳐 날아오를 것만 같은 자세로 빤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가 사람과 눈맞춤을 한다는 게 이상하고 신기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다. 계속 보고 있자니, 황새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야릇한 느낌에 눈길을 돌릴 수 없었다. 그리고 한순간, 황새는 커다란 날개를 활짝 펼치더니 하늘로 날아올랐다.


"황새가 희한하네요…."


낮게 중얼거리며, 비로소 고개를 돌렸다. 분명 바로 앞에 앉아 차를 권하던 노인은 없었다. 해맑게 웃는 꼬마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할아버지는 어디 가셨어?"


"여긴 할아버지가 없는데요."


"무슨 소리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거기 앉아서…, 넌 여기 사니?"


"당연하죠."


꼬마는 한 손으로 다관을 집어 들었다.


"한 잔 더 해도 괜찮은데."


꼬마는 처음부터 내 앞에 앉아 있었다는 투였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귀신에 홀린 게 분명했다. 녹차고 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봐야겠다."


"그러세요. 또 올지도 모르니까, 이쯤에서 헤어지는 것도 좋아요."


"네가 설마…, 할아버지냐?"


"글쎄요."


꼬마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수상한 미소를 지었다. 대청마루에서 내려와 서둘러 대문으로 걸어갔다. 꼬마는 여전히 대청마루에 꼿꼿이 앉아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았다. 고풍스러운 솟을대문 앞에서 다시 뒤돌아보았다. 안개 같은 것들이 마당 가득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대청마루가, 정자와 노송도 천천히 흐릿해졌다. 황급히 대문을 열고 나와 골목에 서서, 허벅지를 꼬집었다. 통증이 몰려왔다.


꿈은 아닌데, 분명 아니어서 귀신에게 홀렸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머리가 느닷없이 지끈거렸다. 갈증이 밀려왔고, 목구멍이 타는 듯 뜨거웠다. 녹차 탓일지도 몰랐다. 서둘러 오피스텔 원룸으로 돌아오자 지금껏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엄청난 피곤이 몰려왔다. 쓰러지듯 침대에 눕자마자 정신을 잃었다.


갈증에 눈을 떠도 한동안 멍한 상태였다.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텅 비어 있었다. 갈증도 잊은 채, 창가에 서서 동네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희뿌연 새벽에 다가오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솟을대문 안에서 있었던 기괴한 일들이 꿈처럼 아득했다.


*


"우리 어디서 만나지 않았나요?"


늦은 오후, 트럭을 창고 앞에 세운 잠바가 사무실에도 가지 않고 곧장 내게로 와서 말을 걸었다. 그동안 곰곰이 생각해봤다는 투였다. 적당한 유대 관계를 맺어놓으면 앞으로 일이 더욱 쉬워질 거라는 뻔한 속내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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