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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는 자수성가했다. 20

by 이순직 Jul 28. 2023

"입사하기 전에 정년퇴직했으니까, 얼굴도 못 봤어요. 소문은 들었죠. 소일거리로 낚시 가게 하면서 지낸다고. 제부도에 가면 대물 낚시라고, 장사는 이럭저럭 된다고 하던데요. 암튼, 본사로 올라가서 잘 적응하길 바랍니다. 여기서 또 마주치면 어쩔 수 없긴 하지만."


눈치는 실없이 웃었다. 뛰어봤자 벼룩이라고, 내 앞에 닥칠 일들이 빤히 눈에 보인다는 자신감이 살짝 엿보이는 미소였다. 지금이야 기획실로 복귀한다니까, 물 만난 고기처럼 신바람 날지 모르나, 권고사직의 강력한 징조라는 의미였다. 그렇거나 말거나, 마음에 담지 않기로 했다. 신경 쓰지 않았다. 퇴근하는 눈치의 가벼운 발걸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사무실로 갔다. 굳이 챙겨야 할 개인 물품은 없지만, 동료들과 작별 인사는 하고 싶었다. 다들 이미 퇴근했는지 보이지 않고, 검수 담당 여직원이 막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축하해요. 본사로 가신다면서요?"


"그런가 봅니다."


역시 나만 모르고 모두 알고 있었네. 끝까지 외지인 취급이라니. 아니라면, 눈치와 포옹하는 걸 내가 봐버려서인가? 후미진 골목 구석에서. 검수가 나를 발견했는지 정확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다음 날 나를 바로는 눈길이 조심스러워졌다는 것뿐이었다.


"먼저 퇴근합니다. 본사에 올라가서도 파이팅하세요."


입에 발린 말이라는 게 빤히 보였다. 검수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을 나가자, 우두커니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2년 가까이 지냈으면서도 여전히 낯설었다. 본사에서 쫓겨 내려와, 애당초 내 자리가 아니라는 다소 오만한 무의식 탓도 있지만, 창고지기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살얼음판 걷듯 내내 긴장한 탓도 있었다. 눈치와 검수의 불타는 사랑을 애써 모른 척한 이유도, 가뜩이나 외지인 취급하는데, 딱히 말할 상대가 없었다. 얼핏 듣기로 눈치의 와이프가 임신 중이라는데, 그런 사실을 빤히 알고서도 달콤한 연애를 하는 검수가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


몇 주 전에 창고로 찾아온 불독을 어르고 달랠 때였다.


"내가 아는 놈 중에는 그래도 네가 가장 번듯한 직장을 잡고 있는데, 어떻게 도와주면 안 되겠냐?"


불독은 다짜고짜 비굴한 표정까지 지었다. 이런 날이 올 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불독이 내 앞에서 고개까지 숙이다니!


"살림을 차려서, 깡패짓은 더 못하겠고, 막노동도 하루 이틀이지, 정말 죽겠어. 나 하나만 바라보고 있는데, 형제처럼 지낸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자리 좀 알아봐 줘라. 운전은 정말 자신 있어. 대기업 전략기획실에 있었잖아?"


때린 놈은 쉽게 잊는다더니, 형제처럼 지냈다고? 웃기지 마라.


"쫓겨난 지 1년이 넘었어."


냉정하게 말했다.


"그래도 연줄은 있을 거 아니야?"


불독에게서 물 위에 떠내려가는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절박한 심정이 빤히 보였다. 보육원 시절, 먹잇감에 불과한 나를 찾아온 것부터가 얼마나 구석으로 내몰렸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취준생 때, 자취방에 찾아온 기억을 떠올렸으리라. 난감한 기분에 휩싸여 있다가, 황이 감사하러 왔다가 했던,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빈말이 떠올랐다.


"없진 않은데, 지금은 사정이 좋지 않아."


"여기, 창고에도 안될까?"


"도일을 찾아가 보지 그래?"


얻어터지던 옛날을 생각하면 매몰차게 만나지도 말아야 했지만, 자존심도 내팽개치고 창고까지 찾아온 것으로 보아, 형편이 매우 궁한 모양이었다. 이미 지나간 어린 시절의 일을 가지고 가타부타 따지는 것도, 이제 와 아무 의미 없었다.


"그 녀석한테도 부탁해놨지. 그런데 통 소식이 없어. 배를 타도 괜찮다고 생각했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겠지만."


"일이야, 하면서 배우는 거지."


"내 말이 그거야. 그런데 녀석은 못마땅한 얼굴이더라. 성질 같아선 옛날처럼 윽박지르고 싶었지만, 이젠 나이를 먹었잖아? 세상 더럽다는 것도 알고. 무엇보다 살림을 차렸는데."


"어떤 여자야?"


"너도 알 거야. 봄이라고. 보육원에서 같이 지냈잖아?"


봄이라고? 내 첫사랑이자 짝사랑이었던 봄이라고? 마음에 강한 통증이 격렬하게 꿈틀거렸다. 불독에게 내색할 수 없었다.


"어떻게 만났어?"


"어떤 놈팡이와 애까지 낳고 몇 년 살다가, 하도 두들겨 맞아서 집 나와 노숙했다더라. 서울역에서 우연히 만났지. 어떡하냐? 철없는 때를 같이 보냈는데, 모른 척할 수도 없고."


불독의 얼굴에서 씁쓸함이 묻어났다.


"더 웃긴 건 뭔지 알아? 나중에 놈팡이를 찾아갔더니, 몇 달을 못 참고, 그 사이에 웬 여자와 살더라. 봄이를 놓아달라고 말할 필요도 없었지."


봄이를 생각하면 불독의 일자리를 당장이라도 수소문해봐야 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본사에 근무하고 있었다면 손쉬운 일이었다. 물론, 지금 당장 아주 불가능하지도 않았다. 황을 만나 부탁하면 딱히 운전직이 아니더라도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나도 그렇고, 봄이도 보육원 출신이잖아? 서로 기대고 살아야지, 누가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 신경 쓰겠어? 그렇지 않냐?"


불독은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눈빛이 말하는 바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불독을 생각하면 매정하게 딱 잡아떼야 하지만, 봄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황을 만나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자신을 구차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설령 부탁한다고 해도 황이 도와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알아볼게."


뜨뜻미지근하게 말했다.


"도일이 녀석도 그렇게 말했어."


믿지 못해, 빈정거리는 투가 살짝 섞인 목소리였다.


"일자리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땅에서 솟구치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긴 하네. 정말 부탁한다. 내가 오죽하면 여기까지 찾아왔겠냐?"


"장담할 순 없지만, 기획실로 복귀할 수 있다는 얘기도 들어서,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운전직은 구해줄 수 있어."


"그래? 언제 복귀하는데?"


불독은 환하게 웃었다.


"나도 모르지."


"뭐야? 그냥 하는 말이야?"


"기다려 봐."


"알았어. 그럼, 너만 믿고 있는다?"


"사고 치지 말고, 막일이라도 당분간 뛰어."


"깡패짓은 졸업했다니까. 봄이랑 살기 시작하면서."


불독은 그제야 한시름 놓은 얼굴로 의자 깊숙이 어깨를 밀어 넣었다. 조금씩 땅거미가 깔리는 골목길을 내다보았다. 길 건너편 모텔에서 네온사인이 서둘러 불타고 있었다. 원나잇 하던 황을 잠깐 떠올리다가 시선에 온 신경이 쏠렸다. 아무리 봐도 영락없는 눈치와 검수 담당 여직원이었다. 창고 후미진 구석에서 포옹하는 장면을 이미 본 터라 놀라지 않았다. 누가 봐도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 연인 사이였다. 아니나 다를까, 짐작대로 눈치와 검수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모텔 출입구로 들어갔다.


"왜? 뭘 보는데?"


불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텔에서 자려고? 난 들어가 봐야 해. 봄이가 기다려. 외박하지 않기로 약속했거든."


"열녀 났네."


무심코 말했다가 불독의 눈치를 봤다. 불독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예전 같으면 비아냥거린다며 꼬투리 잡아 주먹부터 날렸을 터였지만, 성질이 어지간히 죽은 모양이었다. 하긴 취업 부탁하러 와서 성질대로 굴다간 헛수고가 될 터이니 당연했다. 내 눈치를 보는 게 확실했다. 세상일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잔인한 현실을 얼마나 숱하게 맞닥뜨렸을까. 새삼스럽게 관계가 역전되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상처가 없었던 것이 되지 않지만.


"하도 오래전 일이라, 하나하나 기억나진 않지만, 보육원에서 있었던 일들…, 미안하다."


"뜬금없이 그런 말을 왜 해?"


"널 만나러 간다니까, 봄이가 꼭 사과하라고 몇 번이나 강조하더라고."


기억 속의 봄이는 단발머리를 하고, 웃을 때마다 보조개가 패었다.


*


일주일이 지나도 파트장으로부터 아무 소식도 없었다. 하루걸러 저녁때가 되면 불독은 전화해서 취업 청탁을 반복했다. 처음엔 제법 머뭇거리는 말투였지만, 어제는 신세 한탄까지 늘어놓았다.


"우리 같은 고아 출신들은 통째로 사라져도 세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아. 세상은 힘을 가진 놈들의 놀이터니까. 우리는 놀잇감에 지나지 않고. 적당히 쓰임을 당하다가, 쓰레기처럼 버려지지. 봄이가 그랬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어. 보육원에서 나오자마자 가출팸에 합류했는데, 양아치 새끼가 처음엔 잘해주더라고. 대장이라고 부르면서 모두 잘 따랐어. 여섯 명이었는데, 여자애도 있었고. 재미있었지. 날마다 술집 가고, 노래방도 가고. 또래에 처지도 다들 비슷비슷했으니까. 그런데 석 달 뒤에 양아치 새끼가 돈 들고 튀었어. 돈 관리는 양아치가 했고. 정착지원금을 단번에 홀라당 까먹은 거지. 거기서부터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어."


불독은 하소연했다. 불독이 보육원을 나와, 곧장 택시를 잡아타고 떠나던 모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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