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공기 밥그릇 때문에 퍽치기도 하고, 잠자리를 구하기 위해 가스 배관을 타기도 했어. 2층이나 3층쯤은 식은 죽 먹기였으니까. 그러다 감방도 가고. 거기서 형님들 만났지. 출소한 처음엔 만나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디 갈 데가 있어야지. 돈 떨어지니까, 어쩔 수 없더라. 클럽 몇 개 관리해주는 큰형님 밑에서 끼니 걱정, 잠자리 걱정 없이 살았으니, 꽤 괜찮은 편이었어. 오입도 많이 했지. 물뽕이면 일사천리였으니까. 그때가 전성기였어.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럽긴 하지만 후회하진 않아. 비록 인생길이 엄청나게 꼬여버렸지만. 아무튼 클럽에서 지랄염병하는 어떤 미친놈 때문에 다시 감방에 갔어. 우리처럼 힘없는 고아가 무슨 빽이 있겠어? 그렇다고 부장판사 출신의 변호사를 살 돈이 있어?"
고해성사처럼 술술 풀어놓은 지난날이 파란만장하기보다, 가출팸과 어울리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져 밑바닥 생활을 한 거라고 말하지 않았다. 보육원 시절을 생각하면 비아냥거리며 잘못 살아온 과거를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식으로 핀잔까지 마다하지 않겠지만, 취업을 도와달라고 부탁하러 온 마당에, 너무 가혹한 것 같았다.
"봄이를 만나고서 정신을 차렸나 보네?"
"간혹 의심이 들기도 해.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가, 싶은. 왜냐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디에도 취직할 데가 없는 거야. 강남 불독으로 돌아갈까, 허튼 생각할 정도였어. 세상은 더럽고, 치사하게도 힘을 가진 놈들의 놀이터니까. 적어도 강남 불독일 때는 싸구려 힘 정도는 가지고 있었거든. 클럽에 들어오려는 나쁜 놈들을 막아낼 힘은 있었으니. 네가 도와주지 않으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지도 몰라. 어쩌면 나이 탓에 힘들 수도 있지만, 봄이가 싫어해도 어쩔 수 없어."
통화는 길어졌다. 하루건너, 불독과 통화를 끝낼 때마다 안타까움과 영문을 알 수 없는 막연한 책임감 엇비슷한 감정이 생겨났다. 아마도 첫사랑의 애틋한 기억 때문일지도 몰랐다. 애써 봄이를 만나지 않는 것도 기억이 산산이 부서질 것 같아서였다. 보육원 생활은 힘들고 고되지만, 첫사랑의 감정으로 그 시절을 견딜 수 있었다. 비록 짝사랑이었으나."
"그래서 또 부탁한다. 무슨 일이라도 좋으니 네가 힘을 좀 써줘. 우린 형제와 다름없잖아?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때린 놈은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취준생 시절 자취방에 쳐들어와서 얼마 되지도 않은 비상금마저 탈탈 털어간 일도 생각났다. 하지만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냉정하게 굴 생각은 없었다."
"아직은 힘들어. 조금 더 기다려 줄 수 있지?"
서둘러 말하고선 전화를 끊었다.
*
오후 늦게 오피스텔 원룸을 나와, 동네를 훑었다. 혼자 있자니 무력감이 쏟아졌고, 스마트폰 알람만 기다리는 처지가 곤혹스러웠다. 무엇보다 무턱대고 파트장의 연락을 기다리기 보다, 다시 창고지기로 출근할까 어쩔까, 하는 갈등에 휩싸여 머릿속이 복잡했다. 일주일이 넘어가자 쉬는 것도 힘겨웠다. 이리저리 하릴없이 발걸음을 옮기다가, 퍼뜩 고풍스러운 솟을대문이 떠올랐다. 그날의 희한한 경험은 여전히 의문투성이였다. 마치 꿈꾼 듯했다.
길치도 아닌데, 골목마다 샅샅이 살펴도 고풍스러운 솟을대문은 나타나지 않았다. 놀이터에도 꼬마 비슷한 애도 없었다. 몇 시간 동안 골목을 이 잡듯 쏘다녀도 허탕이었다. 이상하다, 수상하다…. 연신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어스름이 안개처럼 조금씩 내려와 쌓일 때쯤 결국 오피스텔 원룸으로 돌아왔다. 스마트폰이 울렸다.
"내가 깜박했어. 소식을 애타게 기다렸을 텐데."
파트장이었다."
"덕분에 재충전했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본사 소식통이 틀린 정보를 주었다며, 무단결근으로 퇴사 처리했다고,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면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다. 고용노동청으로 달려가서 이의를 제기하는 것부터 대단히 번거로운데, 회사를 상대로 하는 개인이 싸움에서 이길 가능성도 대단히 희박했다. 괘씸죄에 걸리거나 미운털이 박혀 오히려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불독의 말처럼 세상은 힘센 자들의 놀이터이니.
"이삼일이면 발령이 날 줄 알았는데, 다소 시간이 길어졌어. 월요일부터 본사 기획실로 출근하라는 통보가 있을 거야. 본사 총무팀에서 전화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계속 출근했던 거야, 알았지? 그리고, 내가 종종 전화로 안부를 물어볼 텐데, 괜찮겠지?"
본사 소식통을 이런 식으로 만들었구나.
"그럼요."
"바쁜 일이 있어서, 이만 끊어. 또 전화할 테니."
이젠 대놓고 반말이네. 어쨌든 기다리던 소식을 받았으니 다행이야. 복귀하자마자 당장 불독의 취업 청탁을 들어줄 수 없지만, 확실한 희망은 던져줄 수 있겠네. 불독에게 전화했다. 신호가 여러 번 계속 가도 받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신호음이 멈추고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심장이 가늘게 떨렸다. 봄이의 목소리였다.
"말씀하세요. 전화 받았습니다."
십중팔구 내 이름으로 전화번호를 저장해두었을 터인데, 봄이는 아는 체를 전혀 하지 않았다.
"장백홉니다."
"백호…, 씨요?"
목소리에서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반가움이 묻어나야 하지 않나? 여자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좋아하는 눈빛을 느낄 수 있다고 하는데, 혹시 보육원 시절에 내가 짝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
"그동안 잘 지냈어…, 요?"
이십여 년 가까운 세월을 단숨에 건너뛰는 것은 무리였다. 불독을 통해 내가 봄이 삶의 궤적을 어느 정도 아는 것처럼, 그녀 역시 요즘 내가 어떻게 생활하는지 알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인지 할 말이 더욱 떠오르지 않았다.
"나야 뭐, 이럭저럭 지내죠."
반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짝사랑의 여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마음 편하게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겠지만, 감정은 손쉽게 컨트롤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폭력이 일상인 혹독한 결혼생활을 겪은 여자의 마음을 읽어낼 능력은 내게 없었다. 모성애는 더더욱.
"보육원 출신 중에서 그래도 백호 씨가 제일 잘 나간다고 도일이가 얘기하더라고요. 예전에 만났을 때요. 곧 본사 전략기획팀으로 복귀한다고 며칠 전부터 우리 여보가 잔뜩 기대하고 있어요. 면목 없지만, 여보가 취직을 부탁하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어요. 내가 또 부탁해도…, 괜찮은 거죠?"
"그럼요."
미안함이나 부담감을 느낄까 싶어, 빠르게 대답했다.
"불독은 어디…, 갔나요?"
앞으로 길어야 한 달 정도 더 기다려달라고 불독에게 말할 참이었다.
"급하게 나가는 바람에 전화를 집에 놓고 갔네요. 몇 시간 전에 긴급 상황이 벌어질 것 모양이라며 빨리 와달라고 했어요. 도일이가요."
"무슨 일인데요?"
"예전에도 몇 번 불러냈거든요. 주먹 쓰는 일이 생길 때마다요. 누가 또 말썽을 피우나 보죠."
봄이는 도일을 편하게 대하는 모양이었다. 섭섭함이 살짝 밀려왔으나, 봄이 역시 보육원 시절의 감정이 남아 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면, 도일을 통해 그 시절의 내 감정에 관해 이야기를 들었거나. 그래서 조심스러운 게 아닐까. 물론 추측이지만.
"월요일부터 본사로 출근한다고 전해주세요. 길어야 한 달 정도 기다려 달라고요. 차량 부서에 사람이 늘 부족하니까 틀림없을 겁니다."
"그런데…, 아시죠? 이마에 똥별을 두 개나 달고 있다는 거요."
"별이요? 이마에?"
느닷없이 별이라니? 의아했다.
"있잖아요? 학교 다녀오면 경찰서에 기록이 남는 거요."
"아, 그거요. 내가 보증을 서니까, 인사 문제는 없을 겁니다. 별은 보이지 않도록 할 수 있죠."
"그렇게만 해주시면 정말 감사해요. 아무래도 직장생활이다 보니 남들 눈에 곱게 비치지 않을 테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기회 주지 않는 사회를 대신해서 친구라면 당연히 힘닿는 데까지 도와야죠."
전화를 끊고 나자, 교복 입은 단발머리에, 커다란 눈망울 초롱초롱 빛나던 모습이 떠올랐다. 살아온 온갖 경험들이 손등의 잔주름이며 손가락 마디에 굳은살로 박혀있을 것 같아 마음이 쓸쓸해졌다. 여전히 보석처럼 빛나지 않아도, 너무나 소중한 짝사랑의 날들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지나갔다.
*
총무팀에 들러 기획팀 사무실로 들어가자, 모두 낯선 얼굴들이었다. 무슨 일로 왔냐는 뚱한 표정들이었다. 사무실 가구 배치도 달라져 뻘쭘하게 서 있는데, 박 주임이 들어왔다.
"아이고, 반갑습니다.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죠?"
사무실 분위기도 그렇지만, 박 주임도 낯설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