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요."
미안함이나 부담감을 느낄까 싶어, 빠르게 대답했다.
"불독은 어디…, 갔나요?"
앞으로 길어야 한 달 정도 더 기다려달라고 불독에게 말할 참이었다.
"급하게 나가는 바람에 전화를 집에 놓고 갔네요. 몇 시간 전에 긴급 상황이 벌어질 것 모양이라며 빨리 와달라고 했어요. 도일이가요."
"무슨 일인데요?"
"예전에도 몇 번 불러냈거든요. 주먹 쓰는 일이 생길 때마다요. 누가 또 말썽을 피우나 보죠."
봄이는 도일을 편하게 대하는 모양이었다. 섭섭함이 살짝 밀려왔으나, 봄이 역시 보육원 시절의 감정이 남아 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면, 도일을 통해 그 시절의 내 감정에 관해 이야기를 들었거나. 그래서 조심스러운 게 아닐까. 물론 추측이지만.
"월요일부터 본사로 출근한다고 전해주세요. 길어야 한 달 정도 기다려 달라고요. 차량 부서에 사람이 늘 부족하니까 틀림없을 겁니다."
"그런데…, 아시죠? 이마에 똥별을 두 개나 달고 있다는 거요."
"별이요? 이마에?"
느닷없이 별이라니? 의아했다.
"있잖아요? 학교 다녀오면 경찰서에 기록이 남는 거요."
"아, 그거요. 내가 보증을 서니까, 인사 문제는 없을 겁니다. 별은 보이지 않도록 할 수 있죠."
"그렇게만 해주시면 정말 감사해요. 아무래도 직장생활이다 보니 남들 눈에 곱게 비치지 않을 테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기회 주지 않는 사회를 대신해서 친구라면 당연히 힘닿는 데까지 도와야죠."
전화를 끊고 나자, 교복 입은 단발머리에, 커다란 눈망울 초롱초롱 빛나던 모습이 떠올랐다. 살아온 온갖 경험들이 손등의 잔주름이며 손가락 마디에 굳은살로 박혀있을 것 같아 마음이 쓸쓸해졌다. 여전히 보석처럼 빛나지 않아도, 너무나 소중한 짝사랑의 날들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지나갔다.
총무팀에 들러 기획팀 사무실로 들어가자, 모두 낯선 얼굴들이었다. 무슨 일로 왔냐는 뚱한 표정들이었다. 사무실 가구 배치도 달라져 뻘쭘하게 서 있는데, 박 주임이 들어왔다.
"아이고, 반갑습니다.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죠?"
사무실 분위기도 그렇지만, 박 주임도 낯설게 다가왔다.
"고생은 무슨…."
"이쪽으로 오시죠."
박 주임은 성큼성큼 익숙한 걸음으로 팀장 자리로 걸어갔다. 망설임 없이 의자에 앉아 나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거만스러웠다. 황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비서실로 승진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박 주임도? 닮은꼴 팀장에게 그렇게 아부를 떨더니만! 새삼스럽게 닮은꼴 팀장의 정체가 궁금했다. 낙하산을 타고 내려올 때부터 뭔가 심상찮은 낌새를 느꼈고, 수상한 소문들도 떠돌았으나, 설마가 사실일 리는 극히 드물다고 믿었다.
"전에 하던 업무를 그대로 하시면 됩니다."
박 주임은 책상 하나를 가리켰다. 입사 후배에게 추월당했다는 당혹감은 둘째치고, 도무지 적응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엉거주춤 뻘쭘하게 서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굴기도 마땅찮았다.
"자자, 다들 여기 보세요!"
박 주임이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에게 소리쳤다. 파티션 너머에서 여러 눈동자가 모여들었다.
"오늘부터 기획팀에서 일하게 될 장 백호 씹니다. 예전에 여기서 일했으니까, 따로 업무 교육을 할 필요 없을 겁니다."
박 주임은 나를 돌아보았다.
"자리로 가시죠. 며칠 적응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일은 금방 손에 잡히더라도 사람들이 초면이라 어색할 겁니다."
말을 마치고 자리에 앉아 서류철을 뒤적였다. 할 말은 다 했으니, 자리로 돌아가라는 뜻인가? 아무리 의자가 사람을 만든다고 해도 그렇지, 아주 꼴값을 떠네. 한 번 후배는 영원한 후배라고! 말할 수 없었다. 출근 첫날부터 박 주임과 사이가 삐거덕거리면 성질 더러운 걸 빤히 알고 있으니, 앞날은 보나마나였다. 시쳇말로 무서워서 따르는 게 아니라, 아니꼽고 지저분해서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창고지기로 돌아갈 수 없었다.
"장 대리님! 같이 일해보셨다면서요? 팀장 성깔이 워낙 깐깐해서 여간 힘들지 않아요. 일하러 직장에 오는 건지, 스트레스를 받으려고 오는 건지, 헷갈릴 때가 많다니까요."
회의가 있다며 박 주임이 사무실을 나가자, 탕비실에서 커피를 따라주며 투덜거렸다. 옆자리에 앉아 연신 볼펜을 돌리던 볼펜이었다. 눈은 모니터를 보면서도 손가락 모두를 이용하는 솜씨가 현란했다.
"불평은 아닌 거 같은데…."
초면에 대뜸 속내를 드러내는 수작이 수상쩍어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불평이라니요? 그만큼 일을 빡세게 한다는 거죠. 예전에도 그랬나요?"
박 주임이 닮은꼴 조 팀장 밑에서 커왔으니, 부하 직원을 다루는 수법도 흉내 내서 밀정을 심어놓았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나를 떠보려는 수작 같지는 않았다. 단박에 태세 전환하는 말머리 돌리기가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그때는 팀장이 아니라서…, 자네도 박 주임한테서, 아니 박 팀장한테서 스트레스를 받아?"
옆에 선 안경에게 물었다. 안경은 볼펜에게 객쩍은 소리를 했다며 눈살을 찌푸렸다.
"글쎄요…."
안경은 얼버무렸다. 박 주임이 팀원들에게 신망을 얻지 못했나? 리더로서 자질은 애당초 부족하긴 했지만. 공치사 듣기 좋아하는 성격에다, 잔머리를 뻔질나게 굴리는 탓이었다. 간도 쓸개도 모조리 빼줄 것처럼 상사의 비위를 맞추려는 행태도 그렇고, 촐랑거리는 입방아도 한몫했을 터였다. 당연히, 볼펜과 안경은 옆에서 고스란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괜찮아. 뒷담화하지 않는 부하가 이상한 거지. 솔직하게 말해."
안경은 눈알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예전에 팀장과 같이 근무했으니, 우리보다 더 가깝지 않나요?"
볼펜이 끼어들었다. 탕비실에서 하는 얘기가 고스란히 박 주임의 귀에 들어갈 거라는 의심이 꿈틀거리는 눈빛이었다. 박 주임은 기획팀 안에서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팀장이었다.
"무슨 헛소리를 하냐? 이 녀석은 예전 일들을 잘 몰라요. 소문이라며 믿지도 않고요. 뇌피셜이라서요. 사실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까 장 대리님을 대하는 걸 보니까, 사실일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들어서…."
"소문은 뭐고, 뇌피셜은 또 뭐야?"
"예전 조 팀장한테 미운털이 박혀서 한직으로 쫓겨났다는 얘기죠. 사회생활은 역시나 능력보다 연줄이나 아부가 장땡이라는 겁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아요."
"맞아. 아부만큼 친밀도를 높이는 게 없지. 난 체질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조 팀장은 지금 어느 부서에 있는데?"
"얼굴 한번 보지 못했어요. 엘에이 지사로 나갔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상하이 아니었어?"
"내가 듣기론 엘에이인데? 엘리트 코스잖아?"
볼펜은 안경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낙하산을 타고 오더니, 또 낙하산을 타고 엘에이든 상하이든 그쪽으로 날아갔네? 대체 정체가 뭐야? 길이 있는 곳에 반드시 사람이 있다더니, 닮은꼴 조 팀장이 걷고 있는 길이 의심스러웠다. 뒷배가 궁금했다.
그 길을 되짚어 거슬러 가다 보면 정체가 드러날까? 아는 거라곤 닮은꼴이라는 사실밖에 없는데, 무슨 수로? 엘에이나 상하이로 날아갈 수도 없고. 설령, 정체를 알아낸다고 해도 뭘 어떻게 할 거야? 왜 미운털을 박았냐고 다그쳐? 똥개가 사료 먹다가 웃을 일이야. 유치하기 짝이 없잖아? 복수에 환장한 도일이나 펄쩍 뛰고 분개할 일이지.
"자존심 상하지 않으세요? 팀장이 후배라면서요?"
안경의 물음에 볼펜이 옆구리를 살짝 건드리면서 눈치를 주었다.
"아이참, 왜 찌르고 난리야? 어차피 다들 알잖아? 말하지 않는다고 없어지는 사실도 아니잖아? 대리님, 그렇죠?"
안경의 지나친 솔직함에 난감했다. 말하지 않고 모른 척하며 넘어가면 좋을 테지만, 안경의 말처럼 분명한 사실이었다.
"자존심 세운다고 급여를 받는 것은 아니니까, 어쩌겠어?"
곤혹스러운 표정을 말하자,
"자본주의잖아요? 돈이 깡패죠. 팀장이 걸핏하면 회장 지시라며 워라벨이 어쩌고 떠들지, 눈속임이거나 귀속임이죠."
안경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볼멘소리를 이어갔다. 지금 나누는 얘기가 박 주임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거라는 안경의 확신이 고맙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걱정스러웠다. 비록 바른말이지만, 불만으로 오해할 말을 앞세우면 언제가 될지 몰라도 반드시 미운털이 박힐 가능성이 높았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특히나 직장에서의 대인관계는 옛날 시집살이처럼 행동해야 했다. 속내를 드러내는 순간, 아무리 선의로 말했다고 해도 불이익이 몰아치기 마련이었다. 내가 창고지기로 쫓겨나지 않았던가.
"맞는 말이야. 야근이나 없애고 말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