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기야 볼펜까지 투덜거렸다. 첫날치고 두 사람에게서 나름대로 신뢰를 얻었으니 나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깻잎머리가 탕비실로 들어왔고, 대화는 끊어졌다. 여직원이 들어오자마자 말을 멈춘 이유를 대충 넘겨짚을 수 있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팀원들의 면면을 파악할 수 있었다. 깻잎머리와 사무적인 대화만 나누었으며, 볼펜과 안경과도 속 깊은 얘기는 하지 않았다. 틈만 나면 개인적인 사정을 캐물었지만, 그때마다 얼버무렸다.
"대리님, 비서실 황 실장과 아는 사이라면서요? 기획팀에서 일했다던데?"
"알지. 그런데 왜?"
"그냥 아는 사이가 아니라, 뭐랄까, 사적으로 가까웠다는 확인할 수 없는 소문이 있어서…, 원래 비밀이란 게 시간이 지나면 모조리 들통나잖아요?"
의아했다. 황이 소문을 퍼뜨릴 가능성은 제로였다. 그렇다고 모텔을 드나들 때, 목격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내가 눈치와 감수의 모텔행을 우연찮게 목격했던 것처럼 누군가 보았다면, 그 당시 바로 소문이 돌았을 터였다. 사내 연애를 금지하지 않지만, 업무의 효용성이니 뭐니 하면서 한 부서에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소문은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야."
"에이, 털어놔 봐요. 지난 일인데 뭐가 어때요?"
볼펜은 은근히 천연덕스럽게 재촉했다. 딴에는 넘겨짚으면서 나를 파악해보고 싶은 모양인데, 까닥했다간 줄줄이 사탕처럼 보육원까지 얽어져 나올 수 있었다. 더구나 황은 여전히 비서실에서 근무하고 있지 않은가. 절대 권력에 대해 뒷담화하고 싶은 욕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업무 스트레스를 풀려는 걸, 누가 말릴 수 있나.
"한 팀에서 일했으니까 서로 아는 사이이지, 그 이상은 없어."
딱 잡아뗐다. 볼펜은 자신이 신뢰받는다는 사실에 의구심이 드는 모양인지, 인상을 찡그렸다.
"정말이요? 그렇다면 황 실장이 조 팀장과 엄청나게 가까웠다는 것도 소문인가…?"
"가까워?"
"물고 빨고 주무르고, 그랬다는데요?"
"물고 빨아?"
"에이, 왜 그러세요? 요즘은 초등학생도 무슨 말인지 다 알아요."
"뭘 아는데?"
"괜히 순진한 척하신다.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닌데. 암튼 회사 밖에서도 종종 목격하기도 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는데요? 완전 신혼 같다고나 할까요?"
볼펜은 슬쩍 곁눈으로 내 표정을 훑었다. 나는 찰나에 눈빛이 흔들리긴 했어도, 이내 덤덤한 표정으로 바꾸었다. 황이 밀정 노릇을 할 때,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기도 했다. 어떤 행동이든 반드시 목적이 있기 마련이었다. 뒤늦게 마음이 조금씩 헛헛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비록 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때 뜨거운 밤을 함께 보낸 기억 때문이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닮은꼴 조 팀장이 엘에이인지 상하이인지, 아무튼 떠났다는 것은 황이 버림받았다는 얘긴가?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새롭게 시작하려는 속셈으로 창고에서 손까지 잡았던 걸까? 밀정 노릇을 할 때는 더없이 쌀쌀맞았는데. 그래야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직장생활이 신물 날 때도 되었으니, 남편 출근시키고 베란다 의자에 앉아 모닝커피를 느긋하고 마시고 싶을 수도 있었다.
"지금도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전설의 먹튀가 됐어요. 예전 조 팀장이요. 몇몇 사람은 까놓고 카사노바라고 욕하지만, 부러워서 죽겠다는 놈들도 꽤 있죠. 미끈한 몸매와 반반한 얼굴이며, 게다가 능력도 있는 여자를 마다할 사내가 어디 있겠어요? 딱 봐도 잠자리가 끝내 줄 것 같잖아요?"
볼펜은 침을 꼴깍, 삼켰다.
"비서실에 어쩌다 다녀온 녀석들은 천국이 따로 없다고 노래를 불러요. 눈만 마주쳐도 온몸에 전기가 찌릿찌릿 오른다나 뭐라나…. 어쩔 수 없겠죠. 여자 앞에서 모든 사내의 욕망은 평등하니까요."
"악플이 사람도 죽이는 세상인데, 너무 막말하는 거 아니야? 퇴직했다면 모를까, 버젓이 비서실에서 근무하잖아?"
"갑자기 왜 그런 말을…? 장 대리님을 믿으니까 말하죠. 다른 사람 앞에선 입도 벙긋하지 않아요. 뒤로 호박씨 까는 게 들통나면 제 명대로 못 살겠죠."
"그러니까, 입을 조심해. 나처럼 창고지기로 쫓겨나기 전에."
따끔하게 충고할 필요가 있었다. 볼펜의 안전을 위해서라기보다, 애당초 입막음하지 않으면, 나에 관한 소문이 복병처럼 숨어 있다가 어느 순간 불쑥 튀어나올지 몰랐다. 분위기에 휩싸여 이야기가 즉흥적으로 흘러가니,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삼삼오오 모여앉아 타인의 삶을 안줏거리 하는 것만큼 흥미진진한 말장난이 어디 있으랴. 창고지기로 있으면서 내내 황에게 연락조차 하지 않아, 다행스러웠다.
볼펜을 사무실로 돌려보내고 차량 부서로 갔다.
"오랜만이네. 돌아온 거야?"
계장은 세차하다 말고 환하게 웃었다.
"얘기는 들었어. 그동안 고생 많았겠어? 그런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사람을 내칠 수 있어?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니까. 나쁜 놈들!"
계장은 맞잡은 손을 힘차게 흔들었다. 입사했을 때부터 줄곧 애로사항을 해결해준 탓인지, 계장은 격렬하게 반겼다. 환한 웃음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계장님도 그동안 잘 계셨어요?"
"나야, 뭐, 매일 그렇고 그렇지. 벌써 한 2년쯤 되지 않았나?"
"그쯤 됐지요."
"얼굴이 아주 핼쑥해졌어. 부모님 댁에 자주 가서 집밥을 많이 먹지 그랬어?"
계장은 내가 보육원 출신이라는 걸, 몰랐다. 가깝게 지낸다고 하더라도 결국 계장은 회사 사람이었다. 빙그레 웃으며 대충 넘어갔다.
"사모님은 편안하시고요?"
"여편네야 맨날 딸 걱정이지."
"왜요?"
"다시 취직하는 것도 싫다, 결혼은 더욱 싫다. 요즘 애들 알다가도 모르겠어."
계장은 한동안 딸에 대한 걱정을 잔뜩 늘어놓았다. 잠자코 들으면서 불독 얘기를 어디쯤에서 꺼내야 하나, 궁리했다. 당연히 총무팀의 인사 검증을 거쳐야 하지만, 공채가 아닌 이상,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계장이 적극 추천하면 총무팀에서도 왈가불가할 수 없었다. 차량 부서 소속도 아닌 내가 나설 경우, 청탁이라고 의심할 게 뻔했다.
"장 대리가 사라지고 난 뒤에, 말들이 많았어. 저성과자여서 화성으로 쫓아냈다는 얘기도 있었고, 지저분한 사생활 때문에 내쳐졌다는 말들도 떠돌았다니까. 나야 전혀 믿지 않았지. 그런데 황은 재주도 좋아. 어떻게 기획팀에서 비서실로 승진할 수 있겠어? 아무튼 장 대리는 건강하게 보여. 그래, 부모님은 두 분 다 편안하시고?"
"그럼요. 아주 건강하십니다."
내가 지방 지사에서 기적적으로 본사로 올라왔다는 사실은 알음알음으로 웬만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어, 지방에서 부모가 살고 있다고 다들 짐작했다.
"계장님이 직접 세차하는 걸 보니, 여전히 일손이 부족한가 봐요?"
"요즘 사람들은 찐득하니 버티지 못해. 운전도 운전이지만, 윗사람 비위 맞추기가 어디 쉬운가? 출퇴근시켜주는 거야, 당연하지만, 지방 출장에 굳이 차를 쓰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잖아? 하루 종일 비위 맞추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기사 한 명, 추천해 드려요?"
박 주임이 닮은꼴 조 팀장 밑에서 커왔으니, 부하 직원을 다루는 수법도 흉내 내서 밀정을 심어놓았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나를 떠보려는 수작 같지는 않았다. 단박에 태세 전환하는 말머리 돌리기가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그때는 팀장이 아니라서…, 자네도 박 주임한테서, 아니 박 팀장한테서 스트레스를 받아?"
옆에 선 안경에게 물었다. 안경은 볼펜에게 객쩍은 소리를 했다며 눈살을 찌푸렸다.
"글쎄요…."
안경은 얼버무렸다. 박 주임이 팀원들에게 신망을 얻지 못했나? 리더로서 자질은 애당초 부족하긴 했지만. 공치사 듣기 좋아하는 성격에다, 잔머리를 뻔질나게 굴리는 탓이었다. 간도 쓸개도 모조리 빼줄 것처럼 상사의 비위를 맞추려는 행태도 그렇고, 촐랑거리는 입방아도 한몫했을 터였다. 당연히, 볼펜과 안경은 옆에서 고스란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괜찮아. 뒷담화하지 않는 부하가 이상한 거지. 솔직하게 말해."
안경은 눈알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예전에 팀장과 같이 근무했으니, 우리보다 더 가깝지 않나요?"
볼펜이 끼어들었다. 탕비실에서 하는 얘기가 고스란히 박 주임의 귀에 들어갈 거라는 의심이 꿈틀거리는 눈빛이었다. 박 주임은 기획팀 안에서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팀장이었다.
"무슨 헛소리를 하냐? 이 녀석은 예전 일들을 잘 몰라요. 소문이라며 믿지도 않고요. 뇌피셜이라서요. 사실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까 장 대리님을 대하는 걸 보니까, 사실일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들어서…."
"소문은 뭐고, 뇌피셜은 또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