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조 팀장한테 미운털이 박혀서 한직으로 쫓겨났다는 얘기죠. 사회생활은 역시나 능력보다 연줄이나 아부가 장땡이라는 겁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아요."
"맞아. 아부만큼 친밀도를 높이는 게 없지. 난 체질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조 팀장은 지금 어느 부서에 있는데?"
"얼굴 한번 보지 못했어요. 엘에이 지사로 나갔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상하이 아니었어?"
"내가 듣기론 엘에이인데? 엘리트 코스잖아?"
볼펜은 안경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낙하산을 타고 오더니, 또 낙하산을 타고 엘에이든 상하이든 그쪽으로 날아갔네? 대체 정체가 뭐야? 길이 있는 곳에 반드시 사람이 있다더니, 닮은꼴 조 팀장이 걷고 있는 길이 의심스러웠다. 뒷배가 궁금했다.
그 길을 되짚어 거슬러 가다 보면 정체가 드러날까? 아는 거라곤 닮은꼴이라는 사실밖에 없는데, 무슨 수로? 엘에이나 상하이로 날아갈 수도 없고. 설령, 정체를 알아낸다고 해도 뭘 어떻게 할 거야? 왜 미운털을 박았냐고 다그쳐? 똥개가 사료 먹다가 웃을 일이야. 유치하기 짝이 없잖아? 복수에 환장한 도일이나 펄쩍 뛰고 분개할 일이지.
"자존심 상하지 않으세요? 팀장이 후배라면서요?"
안경의 물음에 볼펜이 옆구리를 살짝 건드리면서 눈치를 주었다.
"아이참, 왜 찌르고 난리야? 어차피 다들 알잖아? 말하지 않는다고 없어지는 사실도 아니잖아? 대리님, 그렇죠?"
안경의 지나친 솔직함에 난감했다. 말하지 않고 모른 척하며 넘어가면 좋을 테지만, 안경의 말처럼 분명한 사실이었다.
"자존심 세운다고 급여를 받는 것은 아니니까, 어쩌겠어?"
곤혹스러운 표정을 말하자,
"자본주의잖아요? 돈이 깡패죠. 팀장이 걸핏하면 회장 지시라며 워라벨이 어쩌고 떠들지, 눈속임이거나 귀속임이죠."
안경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볼멘소리를 이어갔다. 지금 나누는 얘기가 박 주임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거라는 안경의 확신이 고맙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걱정스러웠다. 비록 바른말이지만, 불만으로 오해할 말을 앞세우면 언제가 될지 몰라도 반드시 미운털이 박힐 가능성이 높았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특히나 직장에서의 대인관계는 옛날 시집살이처럼 행동해야 했다. 속내를 드러내는 순간, 아무리 선의로 말했다고 해도 불이익이 몰아치기 마련이었다. 내가 창고지기로 쫓겨나지 않았던가.
"맞는 말이야. 야근이나 없애고 말하던가."
급기야 볼펜까지 투덜거렸다. 첫날치고 두 사람에게서 나름대로 신뢰를 얻었으니 나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깻잎머리가 탕비실로 들어왔고, 대화는 끊어졌다. 여직원이 들어오자마자 말을 멈춘 이유를 대충 넘겨짚을 수 있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팀원들의 면면을 파악할 수 있었다. 깻잎머리와 사무적인 대화만 나누었으며, 볼펜과 안경과도 속 깊은 얘기는 하지 않았다. 틈만 나면 개인적인 사정을 캐물었지만, 그때마다 얼버무렸다.
"대리님, 비서실 황 실장과 아는 사이라면서요? 기획팀에서 일했다던데?"
"알지. 그런데 왜?"
"그냥 아는 사이가 아니라, 뭐랄까, 사적으로 가까웠다는 확인할 수 없는 소문이 있어서…, 원래 비밀이란 게 시간이 지나면 모조리 들통나잖아요?"
의아했다. 황이 소문을 퍼뜨릴 가능성은 제로였다. 그렇다고 모텔을 드나들 때, 목격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내가 눈치와 감수의 모텔행을 우연찮게 목격했던 것처럼 누군가 보았다면, 그 당시 바로 소문이 돌았을 터였다. 사내 연애를 금지하지 않지만, 업무의 효용성이니 뭐니 하면서 한 부서에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소문은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야."
"에이, 털어놔 봐요. 지난 일인데 뭐가 어때요?"
볼펜은 은근히 천연덕스럽게 재촉했다. 딴에는 넘겨짚으면서 나를 파악해보고 싶은 모양인데, 까닥했다간 줄줄이 사탕처럼 보육원까지 얽어져 나올 수 있었다. 더구나 황은 여전히 비서실에서 근무하고 있지 않은가. 절대 권력에 대해 뒷담화하고 싶은 욕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업무 스트레스를 풀려는 걸, 누가 말릴 수 있나.
"한 팀에서 일했으니까 서로 아는 사이이지, 그 이상은 없어."
딱 잡아뗐다. 볼펜은 자신이 신뢰받는다는 사실에 의구심이 드는 모양인지, 인상을 찡그렸다.
"정말이요? 그렇다면 황 실장이 조 팀장과 엄청나게 가까웠다는 것도 소문인가…?"
"가까워?"
"물고 빨고 주무르고, 그랬다는데요?"
"물고 빨아?"
"에이, 왜 그러세요? 요즘은 초등학생도 무슨 말인지 다 알아요."
"뭘 아는데?"
"괜히 순진한 척하신다.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닌데. 암튼 회사 밖에서도 종종 목격하기도 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는데요? 완전 신혼 같다고나 할까요?"
볼펜은 슬쩍 곁눈으로 내 표정을 훑었다. 나는 찰나에 눈빛이 흔들리긴 했어도, 이내 덤덤한 표정으로 바꾸었다. 황이 밀정 노릇을 할 때,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기도 했다. 어떤 행동이든 반드시 목적이 있기 마련이었다. 뒤늦게 마음이 조금씩 헛헛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비록 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때 뜨거운 밤을 함께 보낸 기억 때문이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닮은꼴 조 팀장이 엘에이인지 상하이인지, 아무튼 떠났다는 것은 황이 버림받았다는 얘긴가?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새롭게 시작하려는 속셈으로 창고에서 손까지 잡았던 걸까? 밀정 노릇을 할 때는 더없이 쌀쌀맞았는데. 그래야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직장생활이 신물 날 때도 되었으니, 남편 출근시키고 베란다 의자에 앉아 모닝커피를 느긋하고 마시고 싶을 수도 있었다.
"지금도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전설의 먹튀가 됐어요. 예전 조 팀장이요. 몇몇 사람은 까놓고 카사노바라고 욕하지만, 부러워서 죽겠다는 놈들도 꽤 있죠. 미끈한 몸매와 반반한 얼굴이며, 게다가 능력도 있는 여자를 마다할 사내가 어디 있겠어요? 딱 봐도 잠자리가 끝내 줄 것 같잖아요?"
볼펜은 침을 꼴깍, 삼켰다.
"비서실에 어쩌다 다녀온 녀석들은 천국이 따로 없다고 노래를 불러요. 눈만 마주쳐도 온몸에 전기가 찌릿찌릿 오른다나 뭐라나…. 어쩔 수 없겠죠. 여자 앞에서 모든 사내의 욕망은 평등하니까요."
"악플이 사람도 죽이는 세상인데, 너무 막말하는 거 아니야? 퇴직했다면 모를까, 버젓이 비서실에서 근무하잖아?"
"갑자기 왜 그런 말을…? 장 대리님을 믿으니까 말하죠. 다른 사람 앞에선 입도 벙긋하지 않아요. 뒤로 호박씨 까는 게 들통나면 제 명대로 못 살겠죠."
"그러니까, 입을 조심해. 나처럼 창고지기로 쫓겨나기 전에."
따끔하게 충고할 필요가 있었다. 볼펜의 안전을 위해서라기보다, 애당초 입막음하지 않으면, 나에 관한 소문이 복병처럼 숨어 있다가 어느 순간 불쑥 튀어나올지 몰랐다. 분위기에 휩싸여 이야기가 즉흥적으로 흘러가니,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삼삼오오 모여앉아 타인의 삶을 안줏거리 하는 것만큼 흥미진진한 말장난이 어디 있으랴. 창고지기로 있으면서 내내 황에게 연락조차 하지 않아, 다행스러웠다.
볼펜을 사무실로 돌려보내고 차량 부서로 갔다.
"오랜만이네. 돌아온 거야?"
계장은 세차하다 말고 환하게 웃었다.
"얘기는 들었어. 그동안 고생 많았겠어? 그런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사람을 내칠 수 있어?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니까. 나쁜 놈들!"
계장은 맞잡은 손을 힘차게 흔들었다. 입사했을 때부터 줄곧 애로사항을 해결해준 탓인지, 계장은 격렬하게 반겼다. 환한 웃음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계장님도 그동안 잘 계셨어요?"
"나야, 뭐, 매일 그렇고 그렇지. 벌써 한 2년쯤 되지 않았나?"
"그쯤 됐지요."
"얼굴이 아주 핼쑥해졌어. 부모님 댁에 자주 가서 집밥을 많이 먹지 그랬어?"
계장은 내가 보육원 출신이라는 걸, 몰랐다. 가깝게 지낸다고 하더라도 결국 계장은 회사 사람이었다. 빙그레 웃으며 대충 넘어갔다.
"사모님은 편안하시고요?"
"여편네야 맨날 딸 걱정이지."
"왜요?"
"다시 취직하는 것도 싫다, 결혼은 더욱 싫다. 요즘 애들 알다가도 모르겠어."
계장은 한동안 딸에 대한 걱정을 잔뜩 늘어놓았다. 잠자코 들으면서 불독 얘기를 어디쯤에서 꺼내야 하나, 궁리했다. 당연히 총무팀의 인사 검증을 거쳐야 하지만, 공채가 아닌 이상,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계장이 적극 추천하면 총무팀에서도 왈가불가할 수 없었다. 차량 부서 소속도 아닌 내가 나설 경우, 청탁이라고 의심할 게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