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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는 자수성가했다. 27

by 이순직 Aug 04. 2023

황은 빙그레 웃으면서 윙크까지 했다. 입가에 머금고 있는 달콤한 미소에, 원나잇의 밤들이 떠올랐다. 장작불처럼 뜨겁게 타올랐던 밤들이, 사랑이 될 수 없었던 것은 지레짐작으로 겁을 집어먹은 내 탓도 있지만, 닮은꼴 조 팀장의 등장과 동시에 느닷없이 쌀쌀맞아진 황 탓도 있었다.


"조만간 인사이동이 있을 거예요."


한결 부드러워진 황의 목소리에 박 주임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본부장 눈에 띄었다더니 이번엔 부산이야?"


나는 비아냥거렸다.


"부산 지사장이면 괜찮을 텐데, 아쉽게도 기획팀 팀장으로 발령이 날 거예요."


"박 주임이 팀장이잖아? 지금!"


"박 팀장은 다른 부서로 이동할 거고요."


황의 말에 박 주임은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결국 이 얘기를 하려고 팀원들을 모조리 퇴근시키고, 지난 일들은 모두 잊어버리자는 식으로 나왔던 거네. 정말 얍삽하네. 앞으로 혹시라도 불이익이 있을까 싶어, 선수 친 거네. 아마도 발령 얘기는 비서실에서 흘러나왔을 터이고, 박 주임은 뒤늦게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강박감에 쫓겼을 게 분명했다. 여차하면 지은 죄 때문에, 젊은 나이에 직장생활을 끝내야 할지 모른다는 막다른 골목까지 내몰렸을지도. 전전긍긍하는 박 주임의 흙빛 얼굴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지난 일들을 털어놓은 이유는 앞으로 내가 입을 다물고 있어 달라? 그런 뜻이네?"


"부탁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박 주임은 꾸벅 고개를 숙이면서 비굴한 웃음을 지었다. 난처한 표정은 황도 마찬가지였다. 밀정 노릇이라면 박 주임보다 황이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다. 물론 내가 단단히 친 방어막이 섭섭했을 것이고, 급기야 배신감마저 느꼈을 터였다. 단맛 쓴맛 모조리 빼앗기고 버려졌다는 느낌에 휩싸여, 한동안 정상적 생활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고 해도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조 팀장이 시켰으니 했겠지. 그렇지 않아?"


"그럼요, 당연한 말입니다."


박 주임은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단, 조건이 있어."


"네?"


"2년 가까이 고생한 것도 그렇고, 경력 관리에도 펑크가 났잖아?"


"정말 그러네요. 안타깝습니다."


"안타깝다니? 지금 놀리는 거야?"


"아닙니다. 절대로! 입이 잘못 나왔…, 아니 말이 잘못 나왔습니다."


"박 주임이 앞으로 하는 거 봐서, 묻어두거나 아니면 응징할 거야. 그래야 공평하잖아? 사회 정의에도 이바지하고."


아직 전체적인 윤곽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섣불리 꼬리 자르기에 응할 필요는 없었다. 엘에이에 있다는 닮은꼴 조 팀장이 없는 상태에서, 비록 2년 정도이기는 하지만, 나락으로 떨어뜨린 놈을 특정할 수 없었다. 복수는 잔인할수록 아름다웠다.


"당연하죠. 그럼, 저는 그렇게 알고 이만…."


박 주임이 자리를 뜨고 나서도 한동안 황은 꼼짝하지 않았다. 둘만 남게 되자 이내 서먹서먹하고 어색한 기운이 맴돌았다. 박 주임에게 했듯이 윽박지를 수도 없었다. 기획팀 팀장으로 발령받더라도 비서실장에게 대들 수 없는 노릇이고, 무엇보다 쌀쌀맞던 눈빛이 부드러워지면서 끈적끈적하기까지 했다.


어쩌면 한편으로 황에게 고맙다고 말을 건네도 이상하지 않았다. 황이 아니었다면 그동안 꼭꼭 숨겨져 있던 모략을 눈치조차 채지 못했을 것이다. 창고지기로 있을 때는 꿈조차 꿀 수 없지만, 복귀한 이상 두 번 다시 유배당하는 꼴을 겪고 싶지 않았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해 둘 필요가 있었다.


"국제 전화를 자주 하겠네?"


"장 대리가 추천한다면 당연히 대환영이지. 그동안 도움 받았던 걸 생각하면, 무조건 합격이야."


"그럼, 며칠 내로 데리고 오겠습니다."


"역시 장 대리야. 이런 식으로 또 날 도와주네."


"그렇게 알고, 올라가 보겠습니다."


"퇴근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회포나 풀어보는 게 어때?"


"다시 올 때, 그때 한잔하죠."


"그려. 그렇게 하자고."


사무실로 올라가자, 박 주임과 황이 등을 보인 채 창가에 서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라를 빼앗긴 것처럼 잔뜩 인상 쓰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비밀스러운 얘기라도 되는 듯 목소리는 낮아, 들리지 않았다. 볼펜과 안경이 박 주임을 곁눈질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비서실에서 내려온 건 처음이에요. 별일이네요."


볼펜이 숨죽여 조심스럽게 목소리로 말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창가로 다가가, 황에게 아는 체를 하기도 마뜩잖았다. 볼펜을 비롯한 동료들의 눈치를 보는 것은 아니고, 박 주임과 황이 목소리 낮춰 은밀하게 대화하는 사이에 끼어들기가 왠지 내키지 않았다. 2년 전만 해도 후배이자 부하 직원이었지만, 지금은 기획팀 팀장과 비서실장이 아니던가. 그들에 비하면 내 처지는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자괴감을 느낄 만도 하지만, 솔직한 심정을 들여다보면 그럴 처지도 아니었다. 돌고 돌아 제 자리지만, 창고지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급기야 박 주임과 황의 주변에 아우라가 보이는 것도 같았다.


"다들 퇴근하지. 참, 장 대리님은 잠깐 남으시고."


얘기가 끝났는지, 박 주임이 이윽고 뒤돌아보며 말했다. 황과 눈길이 마주쳤다. 팀원들이 주섬주섬 일어났다. 뭐야? 무슨 일로 나만 남으라는 거야?


"내일 뵀겠습니다. 먼저 퇴근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남은 일은 집에서 끝내겠습니다."


팀원들이 도망치듯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가자, 어색한 침묵이 겹겹이 쌓였다. 나는 엉거주춤 뻘쭘하게 서서 박 주임과 황을 건너다보았다.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시말서를 쓸 일도 없었다. 팀원들이 없으니, 선배로서 무슨 일 때문이냐고 대뜸 따지듯이 묻고 싶었다. 그러나, 처지가 바뀐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하극상은 인사고과에 치명적인 약점으로 기록될 게 뻔했다.


"커피나 한잔씩 하면서 얘기하죠."


황이 탕비실로 갔다. 시비 걸거나 트집을 잡으려는 분위기는 아닌 듯한데, 대체 무슨 일이야? 서로의 처지가 뒤바뀌었으니, 현실을 인정하고 업무처리에서만큼은 상하관계를 확실히 하자는 다짐이라도 받으려고? 박 주임은 분명히 해두고 싶은 부분이겠지만, 직접적으로 마주치는 업무는 애당초 없는 황은 왜 이 자리에 있지? 나를 기획팀에서 밀어낼 때, 밀정 노릇을 함께 하던 배를 탔다는 동료 의식이 남아 있어, 박 주임에게 힘을 보태기 위해 함께 있나?


잠시 후에 황이 커피를 탄 컵을 들고 왔다. 입사해 기획팀에 처음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하지 않은 뜻밖의 행동이었다. 어리둥절했다. 대체 무슨 꿍꿍이야? 주변에서 얼쩡거리며 밀정 노릇 하던 버릇이 도졌나? 싸구려 친절을 베풀면서 경계심을 허물려는 수작인가?


황이 커피를 홀짝거렸다. 마음에 담고 있는 말을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화성에서 고생 많이 했죠?"


뜻밖에도 따뜻한 위로가 느껴지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뜬금없이 분위기가 왜 이래? 아까와는 딴판이잖아? 나라 잃은 심각한 표정과 비밀스러운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었다.


"손을 만졌더니 거칠었잖아요?"


황을 바라보았다. 창고에서 손을 잡았던 이유가 이거였어?


"변명이겠지만…."


박 주임은 머쓱해서 어눌하게 말했다.


"제가 몹쓸 짓을 했습니다. 장 대리님을 화성으로 쫓아낸 나쁜 놈입니다."


느닷없이 무슨 소리야? 닮은꼴 조 팀장이 아니었다고?


"베트남 투자 건에 대한 잘못된 자료를 장 대리님에게 줬습니다."


"제대로 된 자료는 내가 받았고요."


황이 끼어들었다.


"어쩔 수 없었어요. 조 팀장의 지시였으니까요."


박 주임은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꼴이었다. 그런데, 지금 왜, 굳이 털어놓는지 알 수 없었다. 이미 지난 일이니 묻어놓고 지나가도 내가 알 길이 없고, 설령 안다고 해도 부하 직원으로 곤두박질한 마당에 따지고 드는 것도 마땅찮은데, 왜? 지금, 이 시점에 털어놓는 거지?


그 당시에 베트남 보고서를 닮은꼴 조 팀장이 검토도 하지 않았다. 보지도 않을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한 이유가 궁금했다. 단순히 괴롭히기 위해서? 저성과자로 몰아붙이기 위한 증거를 수집하려고?


"팀장이 보고서를 읽지 않은 걸로 아는데?"


"저성과자로 낙인을 찍는데 필요한 물증이었어요. 아이디어는 내가 냈지만, 팀장이 밀어붙이라고 해서…."


박 주임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도 모르게 함정에 빠졌다는 거네? 그런데, 내가 기획팀으로 돌아왔다고 털어놓는 거야? 도대체 무엇 때문에?"


"매일 얼굴 보면서 지내야 하는데, 양심에 찔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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