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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는 자수성가했다. 28

by 이순직 Aug 05. 2023

박 주임은 기다렸다는 물음이라는 듯이 재빠르게 말했다. 믿을 수 없었다. 멀쩡한 사람을 함정에 빠뜨릴 정도로 영악한데, 이제야 뒤늦게 양심에 찔린다고? 누굴 동네 바보형으로 아나. 아무리 착해도 참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벌컥, 화를 내면서 뺨따귀를 후려갈기고 싶지만, 황이 있어 비서실로 소문이 퍼질 게 뻔했다. 급기야 늙은이 회장의 귀에 들어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전히 저성과자라는 낙인이 채 지워지지 않은 터에, 가까스로 기획팀으로 복귀했는데, 그나마 제자리로 돌아온 행운을 날려버릴 수 없었다.


"그렇게 화를 낼 일은 아니에요."


황이 붉으락푸르락하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바로 위 직장 상사를 배신하고, 한 다리 건너에 있는 닮은꼴 조 팀장에게 온갖 비굴한 충성을 일삼아 창고지기로 유배 보낸 야비한 모략을 눈감아 두라고? 당한 만큼 되돌려주는 게 정의가 아닌가?


"기획팀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알고 보면 황 실장 덕이니까요."


박 주임이 말했다. 함정에 빠졌던 것처럼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느낌이 순식간에 밀려왔다.


"사실입니다. 총무팀장에게 강력하게 주장했어요. 구관이 명관이라고, 아무래도 기획팀에서 일했던 사람이 낫지 않겠냐고."


어쭈구리? 요것들 봐라? 한번 당하지, 두 번씩이나 당할 줄 알고? 뚫린 주둥이라고 또 수작질이야? 인사 명령은 늙은이 회장이 최종 결재하는데, 기껏해야 황의 힘으로? 어림 반 푼어치도 없었다. 물론 총무팀장이 인사서류를 적당히 조작하면 회장도 모를 터이지만.


"그래서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저성과자 함정에 빠뜨려 쫓아낼 때는 언젠고, 인제 와서는 복귀시켜 주었으니 감지덕지 하다고 넙죽 큰절이라도 하란 얘긴가? 도무지 앞뒤 맞지 않는 두 사람의 행태가 부쩍 의심스러웠다. 막말로, 지난 일이니 스스로 모른 척하고 넘어가면 나 역시 알 도리가 없는 내막인데, 긁어 부스럼을 일부러 만들지는 않을 터인데,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본부장님이 지켜보고 계십니다."


박 주임은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기껏해야 복도에서 스치듯 지나가며 본부장을 보긴 하지만, 딱히 나를 콕 집어 눈길을 마주친 적이 없어, 의외였다. 물론 나를 조 팀장으로 오해해서 말을 걸어온 적은 있지만.


"그게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 본부장님의 눈에 띄었다는 거죠. 아직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황은 빙그레 웃으면서 윙크까지 했다. 입가에 머금고 있는 달콤한 미소에, 원나잇의 밤들이 떠올랐다. 장작불처럼 뜨겁게 타올랐던 밤들이, 사랑이 될 수 없었던 것은 지레짐작으로 겁을 집어먹은 내 탓도 있지만, 닮은꼴 조 팀장의 등장과 동시에 느닷없이 쌀쌀맞아진 황 탓도 있었다.


"조만간 인사이동이 있을 거예요."


한결 부드러워진 황의 목소리에 박 주임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본부장 눈에 띄었다더니 이번엔 부산이야?"


나는 비아냥거렸다.


"부산 지사장이면 괜찮을 텐데, 아쉽게도 기획팀 팀장으로 발령이 날 거예요."


"박 주임이 팀장이잖아? 지금!"


"박 팀장은 다른 부서로 이동할 거고요."


황의 말에 박 주임은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결국 이 얘기를 하려고 팀원들을 모조리 퇴근시키고, 지난 일들은 모두 잊어버리자는 식으로 나왔던 거네. 정말 얍삽하네. 앞으로 혹시라도 불이익이 있을까 싶어, 선수 친 거네. 아마도 발령 얘기는 비서실에서 흘러나왔을 터이고, 박 주임은 뒤늦게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강박감에 쫓겼을 게 분명했다. 여차하면 지은 죄 때문에, 젊은 나이에 직장생활을 끝내야 할지 모른다는 막다른 골목까지 내몰렸을지도. 전전긍긍하는 박 주임의 흙빛 얼굴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지난 일들을 털어놓은 이유는 앞으로 내가 입을 다물고 있어 달라? 그런 뜻이네?"


"부탁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박 주임은 꾸벅 고개를 숙이면서 비굴한 웃음을 지었다. 난처한 표정은 황도 마찬가지였다. 밀정 노릇이라면 박 주임보다 황이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다. 물론 내가 단단히 친 방어막이 섭섭했을 것이고, 급기야 배신감마저 느꼈을 터였다. 단맛 쓴맛 모조리 빼앗기고 버려졌다는 느낌에 휩싸여, 한동안 정상적 생활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고 해도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조 팀장이 시켰으니 했겠지. 그렇지 않아?"


"그럼요, 당연한 말입니다."


박 주임은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단, 조건이 있어."


"네?"


"2년 가까이 고생한 것도 그렇고, 경력 관리에도 펑크가 났잖아?"


"정말 그러네요. 안타깝습니다."


"안타깝다니? 지금 놀리는 거야?"


"아닙니다. 절대로! 입이 잘못 나왔…, 아니 말이 잘못 나왔습니다."


"박 주임이 앞으로 하는 거 봐서, 묻어두거나 아니면 응징할 거야. 그래야 공평하잖아? 사회 정의에도 이바지하고."


아직 전체적인 윤곽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섣불리 꼬리 자르기에 응할 필요는 없었다. 엘에이에 있다는 닮은꼴 조 팀장이 없는 상태에서, 비록 2년 정도이기는 하지만, 나락으로 떨어뜨린 놈을 특정할 수 없었다. 복수는 잔인할수록 아름다웠다.


"당연하죠. 그럼, 저는 그렇게 알고 이만…."


박 주임이 자리를 뜨고 나서도 한동안 황은 꼼짝하지 않았다. 둘만 남게 되자 이내 서먹서먹하고 어색한 기운이 맴돌았다. 박 주임에게 했듯이 윽박지를 수도 없었다. 기획팀 팀장으로 발령받더라도 비서실장에게 대들 수 없는 노릇이고, 무엇보다 쌀쌀맞던 눈빛이 부드러워지면서 끈적끈적하기까지 했다. 어쩌면 한편으로 황에게 고맙다고 말을 건네도 이상하지 않았다. 황이 아니었다면 그동안 꼭꼭 숨겨져 있던 모략을 눈치조차 채지 못했을 것이다. 창고지기로 있을 때는 꿈조차 꿀 수 없지만, 복귀한 이상 두 번 다시 유배당하는 꼴을 겪고 싶지 않았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해 둘 필요가 있었다.


"국제 전화를 자주 하겠네?"


"국제 전화? 그런 거 안 하는데요. 왜요?"


황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서 의아해했다. 닮은꼴 조 팀장을 염두에 두고 한 물음인데, 황은 눈치채지 못하는 것인지, 모른 척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화성으로 내려가기 전에, 닮은꼴 팀장과 황을 회사 밖에서 여러 번 목격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는 짐작은 누구나 할 수 있었다.


"조 팀장이 엘에이에 있다며?"


황의 얼굴이 짧은 순간 흔들렸다.


"불쾌했다면 사과할게. 그냥 무심코 한 말이니까, 오해하지 말아줘."


"업무가 서로 다른데, 국제 전화를 해서 할 얘기가 있을까요?"


황은 오히려 되물으면서 무심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이 닮은꼴 조 팀장에게 안달이 났다는 것쯤은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무척이나 덤덤했다. 소문은 항상 당사자를 피해 간다더니, 황도 예외는 아니었다.


"저녁, 같이 할래요? 맛집을 아는데."


황이 느닷없이 농염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원나잇의 밤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혹의 눈빛이었다. 늪과 같았다. 처음엔 이성적인 판단보다 육체적인 욕망에 눈이 멀어 그 눈빛에 빠져들었는데,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보육원 출신이라는 사실을 되새길 수밖에 없었다. 현실의 벽은 너무 높았다.


"어서 가요. 어서요."


황이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선약이 있어서…."


있지도 않은 약속을 꺼냈다.


"아쉽네요. 맛집은 다음에 가기로 해요."


황은 옷소매를 슬그머니 놓으면서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거나 말거나, 더럽고 치사하고 비겁한 모략이 한눈에 확실해져, 닮은꼴 조 팀장과의 염문설은 제쳐놓고라도, 밀정 짓만 했다고 판단해도 황을 쉽게 용서할 수 없었다. 비록 원나잇의 밤들은 달콤했지만.


*


일주일이 지나도 발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박 주임은 닮은꼴 조 팀장이 그랬듯이 나와 눈조차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당연히 업무지시도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눈치챈 사람은 깻잎머리였다. 여자의 직감은 남자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했다.


"장 대리님. 싸웠어요? 박 팀장님이랑. 계급장 떼고?"


"왜 그렇게 생각하지?"


"사무실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아서요. 장 대리님이 오기 전까진 좀 삐걱거리긴 했어도 나름 괜찮았거든요. 지금은 폭풍전야의 고요함이랄까, 서늘한 긴장감마저 느껴져요."


"서로에게 익숙해지지 않아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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