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집에서 시커먼 사내놈들이 낯선 여자에게 난동을 피워도 모른 체 해라?"
"그거는 아니고. 암튼 이건 부탁이니까, 꼭 명심해야 한다. 알았지?"
"봄이를 또 한 명 옆에 뒀네. 알았어, 알았다. 네 말이면 무조건 충성한다. 됐지?"
불독은 충성 선서를 한다는 투로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지푸라기라도 덥석 잡을 정도로 여유 없는 절박한 상황이라는 걸, 확실히 짐작할 수 있었다. 친구 앞에서 그나마 간당간당 남아 있던 알량한 자존심마저 내팽개친 자세였다. 어디에서도, 취준생 무렵 자취방을 찾아와 두부를 요구했던 것처럼 스스로 당당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불독을 보내고 사무실로 올라가자, 팀원들이 자리에 앉아 있지 않고, 웅성거리며 한쪽에 몰려 서 있었다. 일제히 나를 바라보는 굳은 표정과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악몽 같은 따돌림이 떠올랐다. 그러나, 창고지기로 있을 때처럼 외지인을 쳐다보는 경계심 깊은 눈빛은 아니었다.
"장 팀장님! 축하합니다."
볼펜이 굳은 표정을 풀면서 말했다.
"좀 전에 인사발령이 났습니다. 축하합니다."
"축하해요. 장 팀장님!"
"오늘 한 턱 쏴야 하지 않나요?"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즐거워했다. 박 주임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눈짓으로 팀장 자리를 가리켰다.
"영업 1팀으로 갔어요. 아까 바리바리 짐을 챙겨서 갔죠. 인수인계를 그쪽에서 먼저 받아야 한다고. 팀장님도 인수인계를 받아야 하지 않나요?"
"무슨 소리! 기획팀 토박이신데, 눈감고도 어떤 일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알 정도죠? 그렇죠?"
"일리 있는 말이네."
몇 달 같이 일하면서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실수를 빈틈없이 잡아내 바로 고쳐주어서인지, 팀원들은 제각각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충, 그렇지."
나는 짐짓 멋쩍어하면서 말했다.
"우선, 자리부터 옮겨야죠?"
"그럴까?"
책상마다 파티션이 있지만, 팀장 자리는 의자에서 일어나면 팀원 모두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농땡이를 피우는지 어쩌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자리에 앉아보니 그동안 박 주임이 나를 어떻게 관찰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간혹 고개를 들다가 박 주임의 눈과 마주친 적도 있었는데, 속으로 얼마나 뜨끔했을까, 슬며시 웃음이 입가에 번졌다.
죄짓고 살기 힘들다는 말에 따르면, 얼마나 안절부절못하며 애간장을 태웠을까. 이제는 출퇴근길이나 복도에서 마주치지 않는 이상 얼굴을 맞댈 일이 없어졌으니, 박 주임도 영업 1팀으로 발령받은 것이 다행이라 여길지도 몰랐다. 퇴근까지 시간이 꽤 남았는데도 서둘러 자리를 비운 것만 봐도 넉넉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는 믿거나 말거나, 그런 얘기가 아니야. 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대화가 될지도 모르니까."
도일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대단한 결심을 앞세운 듯 심호흡을 서너 번 했다. 보육원 시절부터 곧잘 짓궂은 장난을 치던 녀석이라, 나는 심드렁했다. 눈빛을 반짝거리며 귀를 바싹 곧추세울수록 신나는 쪽은 언제나 도일이었다. 장난에 당한 기억은 녹슬지도 않았다.
봄이가 뚝방에서 널 보잔다. 저녁을 먹고 원장의 배려로 마련한 방에서 혼자 시험공부 중이었다. 슬그머니 방문이 열리면서 도일은 히죽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봄이가 눈치챘나? 우리 백호가 좋아한다는 거? 도일의 입에서 웃음이 실실 빠져나왔다. 지금 시험이 중요하냐? 어서 가봐. 봄이가 부르는데. 도일의 보챔에 시험공부고 나발이고, 뚝방으로 나갔다.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했고, 바람은 서늘했다. 봄이를 좋아한다고 도일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날 만나자고? 의아했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는 것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어스름이 짙어지고 땅거미가 몰려와도, 봄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늘에 별들이 하나둘씩 불 밝힐 때쯤 되어서야 어둠 속에서 도일이 키들거리며 나타났다. 긴가민가했는데, 백호, 너 진짜구나! 원장한테 들키는 날이 제삿날이 될 거야. 아서라!
나는 기억을 덮으며,
"네 얘기보다, 불독을 채용할 수 있을 것 같아."
도일의 확신에 찬물을 확, 끼었었다.
"무슨 얘기야? 채용하다니? 불독을? 누가? 어디에?"
도일은 화들짝 놀라며 물음을 쏟아냈다.
"하나씩 물어라."
"누가 그런 더러운 깡패를 채용해? 말이 되지 않잖아?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멀쩡한 사람을 윽박지르고, 주먹이나 휘두르는 재주밖에 없는데. 물론, 가끔 내가 도움을 받는 친구긴 하지만."
"그렇긴 하지. 똥별 두 개씩이나 달았다니까."
"똥별?"
"교도소에서 달아주는 별."
"그건 몰랐네. 아무튼 길바닥 생활이 몸에 익은 놈을 누가 채용해? 조직에 또 들어갔다는 거야? 그거라면 채용이라고 말하면 안 되지. 친구로서 오히려 막아야 하잖아?"
"취업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조직에 들어간다는 말이야."
"내가 가끔 녀석과 만나는데, 조폭 노릇을 하기엔 좀…, 똑똑하지 않나? 더구나 봄이랑 사는데, 봄이 성격에 가만 놔두지 않을 텐데. 이혼은 둘째치고, 당장 보따리 싸서 뒤도 돌아보지 않을걸. 불독이 말하더라. 봄이 걔, 만만치 않아. 보육원에 있을 때나 순진하고 심성 고왔지, 십 년 이상 밑바닥에서 온갖 더러운 놈들 발길에 차이고, 무시당하고, 빼앗기며 살아서 기가 보통 쎄진 게 아니라던데? 완전히 악바리 근성으로 무장했다던데? 해병대 저리 가라야."
"봄이 덕에 불독이 사람 노릇을 하게 됐어."
"봄이를 만났어?"
"불독을 만났지. 취업 부탁을 하더라. 내가 화성에 있을 때. 택시 운전도 했다던데?"
"그거, 순 구라야. 아니지, 완전 구라는 아니고, 한 일주일 했나? 손님하고 대판 싸워서 쫓겨났대. 서비스업에서 손님하고 싸워? 차라리 교통사고를 내서 쫓겨났다면 모를까, 말이 되지 않잖아? 자기 성질을 못 이기는 놈이야. 덕분에 싸움이 날 것 같다, 싶으면 몇 번 불러내서 덕을 보긴 했지만. 물론 도망친 동남아 애들 붙잡을 때도 톡톡히 도움을 받았지."
"불독을 이용해 먹었다는 거네? 사람 장사하더니 변했어."
"야, 그게 무슨 이용이냐? 친구 좋다는 게 뭐냐? 내가 급할 때, 손 좀 빌리는 거지. 사실 도망친 놈들이 있었는데, 동남아 애들, 보기엔 엉성해도 치밀해. 얍삽하고 잔머리를 엄청나게 굴리지. 불독 덕에 몇 명 잡았어. 그건 그렇고, 어디에 누가 채용한다는 거야? 그러면, 앞으로 손 빌리기는 꽝인데."
"내가 다니는 회사."
"뭐라고? 대기업이잖아? 법인 택시는 똥별 달아도 받아주지만, 대기업에서? 믿을 수 없는데? 인사 검증에서 떨어질걸?"
"그래서 내가 있잖아?"
"뭐야? 네가 무슨 힘이 있다고? 기껏해야 대리잖아? 그 회사에 대리가 수천 명은 되지 않냐? 허풍 조금 보태서."
"팀장으로 승진했다."
"팀장이라도 그렇지. 거기서 거기, 아니야? 대리나 팀장이나 어차피 시키는 일만 하는 월급쟁이잖아?"
"기획팀 팀장은 조금 다르지. 경력에 프리미엄이 붙어."
"그건 이직할 때나 참작하는 거고."
"아무튼, 채용될 거야. 불독은 친구 찬스를 쓰는 거고. 우리처럼 보육원 출신들은 부모 찬스를 쓸 수 없으니."
"불독이 사무직을 할 능력이 안 될 텐데?"
"기사야. 임원들 실어 나르는 거지."
"아웃소싱이 아니었어?"
"회사 기밀을 많이 알고 있는 임원들인데, 아웃소싱이 가능하겠어?"
"그렇긴 하겠네."
도일은 뜻밖에도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쩝쩝, 입맛을 다셨다. 불독이 부러운 모양인지 딴지를 걸었다.
"기사 노릇 하려면 운전도 운전이지만, 사람이 찐득하니 입이 무겁고, 붙임성도 좋아야 하고, 욱하는 성질도 감출 줄 알아야 하는데…, 불독이 될까?"
"봄이랑 살아서 성격도 죽일 줄 알더라. 아니꼬울 텐데도 나한테 깍듯하던데? 친구인데도."
"그건 그래. 많이는 아니지만, 쪼금 바뀌었다고나 할까?"
"앞으로 더 변하겠지. 변하진 않고선 살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느꼈을 나이도 됐잖아?"
"맞아. 계속 깡패짓을 일삼다가 똥별만 더 달지, 나이에 걸맞게 사람 노릇 하며 살 수 없잖아? 봄이를 잘 만났어. 봄이가 아니고선 어떻게 불독을 꽉 잡고 살 수 있어. 다른 여자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 더욱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