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팀장님과 예전에 같이 일해보셨다면서요?"
"직급이 뒤바뀌어서 그럴 거야. 신경 쓰지 말라고."
"그럴까…, 요? 장 대리님이 오던 첫날 빼고, 서로 대화하는 것도 못 봤고…, 요 며칠 사이에 더욱 데면데면하잖아요?"
"신경 쓰지 마. 곧 익숙해질 테니까."
깻잎머리에게 팀장으로 승진될 거라는 얘기는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20대 중반의 여자답게 세상을 아름답게 보고 있으니, 굳이 잔인하게 굴 필요는 없었다. 직장생활이 보이지 않는 권모술수와 중상모략이 일상사인 살벌한 정치판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말해줄 수 없었다. 박 주임과 황이 자신의 작은 이익을 위해 무슨 작당을 하는지 말할 수 없었다.
"로비에서 장 대리님을 찾는 사람이 있다는데요?"
볼펜이 수화기를 들어 흔들며 말했다. 수화기를 건네받으니 불독의 목소리였다. 로비로 내려가자, 불독은 팔을 번쩍 들었다.
"오라고 해서 오긴 왔는데, 아무 준비도 없이 오라니까 당황했잖아?"
차량 부서로 가면서 불독은 긴가민가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계장님이 면접을 볼 거니까, 따로 준비할 것도 없어. 사람은 좋으니까 달리 걱정할 필요도 없고.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가족관계를 묻거든 평범하게 대답해야 한다. 보육원 얘기는 입 밖에도 내지 말고."
"그쯤은 나도 안다. 고아에, 똥별 달고 있다면 누가 좋아하냐? 그런데 너도 가족관계를 은근슬쩍 넘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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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를 제출하긴 했지만, 독립했다고 했지. 눈치채지 못하더라. 오히려 칭찬받았다니까. 젊은 나이에 부모한테 손 벌리지 않는다고."
"맞아. 우리 같은 사람은 정상적인 루트로 취업할 수 없지."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어. 정식으로 면접을 보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계장 눈에 들면 합격과 마찬가지야."
계장은 땀을 뻘뻘 흘리며 세차하고 있었다.
"계장님! 전에 말씀드렸던 그 친굽니다."
"안녕하십니까?"
불독은 허리를 구십 도로 꺾어 깍듯이 인사했다. 계장은 불독의 얼굴을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혹시라도 불독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건가?
"허우대를 보니, 주먹깨나 쓰게 생겼습니다."
계장은 불독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기억의 그늘진 구석까지 헤집고 있는 걸까?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설마가 사람 잡는 걸 숱하게 보아온 나로선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성 창고지기로 당하기까지 했으니 당연했다.
"겉보기에만 그렇습니다."
불독이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착한 친굽니다. 어릴 적부터 알던 친구라, 잘 알죠. 책임감 있고, 명량하고."
말을 하면서도 계장의 표정을 살폈다. 서너 번 갸우뚱하던 고개가 멈추어도 의혹의 눈빛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계장은 기억력이 그다지 나쁘지 않은 데다가 워낙 마당발이라, 화성 물류센터 파트장도 알고 있었다. 파트장뿐만 아니라 검수도 알고 있을 정도니, 다른 사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처음 입사했던 지방 지사의 지사장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사람들은 모두 회사와 연결된 사람이라 안심할 수 있지만, 방심할 수 없었다. 내가 모르는 계장의 생활 공간이 충분히 있을 터이니.
"그런 것 같아. 믿음직한 구석도 있고."
계장은 떠오른 기억을 확실히 붙잡았는지, 그제야 빙그레 웃으며 단정적으로 말했다. 뜻밖이었다. 불독에 대한 긍정적인 말에 한시름 놓았다."
"어릴 적에는 꽤나 개구쟁이였어요."
"남자애는 다들 그렇지."
계장은 다시 한번 불독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본 것도 같은데…, 혹시 몇 달 전에 돈암동 뒷골목 술집에서 싸움 났던 거 기억해요?"
계장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봄이와 살면서부터 깡패짓은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불같은 성질머리를 뜯어고치지 않는 이상 믿을 수 없었다. 침이 바싹 말랐다. 만일, 불독이 술집에서 깽판을 부렸다면, 아무리 술김에 행패를 부렸다고 하더라도 이미 계장의 눈 밖에 난 셈이었다. 취업은 이미 물 건너간 꼴이었다.
"도일이란 친구가 불러서 몇 번 갔었죠."
불독은 의외로 덤덤했다.
"술에 취한 젊은 여자를 다짜고짜 두들겨 패던 사내 둘을 꼼짝 못 하게 하지 않았나요?"
불독은 눈동자를 굴리며 기억을 살폈다.
"아, 애인이라고 주장하는데, 사실은 모르는 남자였던?"
"맞아요."
"그때, 어쩔 수 없이 끼어들었죠. 여자는 한사코 모르는 남자라고 하고, 남자는 애인이니까, 상관하지 말라고 하고. 난처했어요. 도일이가 서로 모르는 사이라는 말에 끼어들었죠."
"그 자리에 내가 있었는데, 남자 둘이 느닷없이 들어와 시비를 걸었어요. 계속 아는 척을 하면서. 여자도 나중엔 짜증이 나는지, 막말했고."
나도 모르게 두 사람의 흥미진진한 얘기에 귀를 세웠다.
"남자들도 어디선가 술을 한잔 걸치고 왔던 모양이야. 취하면 여자 생각만 하는 놈들이 꽤 있지. 그렇다고 생판 모르는 여자한테 수작질을 걸다니, 나쁜 놈들이지. 덩치가 워낙 좋고 다부지게 생겨서, 손님들은 모두 쳐다보기만 했지. 나도 그랬고.
"그럴 만도 했지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야. 부끄러운 일이지. 나이 먹었다고, 상대가 힘 좀 쓰게 생겼다고 물러나거나 비켜서면 비겁한 거지. 예전 같으면 다들 그렇게 여겼는데, 요즘은 남의 일이라며 당연히 끼어들지 않으니, 세상이 참 변했어. 한 대라도 맞으면 누구한테 하소연할 거야? 맞은 자신만 손해라고 생각하지. 괜스레 남의 일에 끼어들었다고 후회하면서. 그런데 자네는 서슴없이 여자를 떨어뜨려 놓고, 덤비는 남자 둘을 제압했잖아? 속으로 손뼉까지 쳤다니까. 정말 잘했어. 내가 다 고맙더라니까."
"아닙니다. 제가 오히려 부끄럽습니다."
불독은 계면쩍어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계장이 불독에게 말을 놓는 것으로 보아 맘에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놈이 덩치와 다르게 겸손까지 해요."
기회다, 싶어 계장에게 말했다. 계장은 흐뭇한 미소에 고개를 끄덕였다.
"운전 경력은 얼마나 되나?"
"법인 택시를 3년 했고요, 1종 대형면허도 있습니다."
"우리, 장 대리처럼 총각인가?"
"결혼했습니다."
"좋아요. 장 대리한테는 좀 섭섭한 소리겠지만, 사내는 가정이 있어야 책임감이 생기지. 술집 사건 때문인가, 인상도 좋아 보여."
"고맙습니다."
불독은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소개했고, 계장이 마음에 들어 하니, 취업은 성공할 거라는 행복한 예감에 들뜬 기분이 여실했다. 하지만 이제 겨우 첫걸음일 뿐이었다. 계장이 총무팀장을 괴롭혀야 하고, 총무팀장은 비서실에 일손이 부족하다며 티오(TO)를 어서 채워달라고 닦달해야 했다. 박 주임의 말처럼 내가 승진한다면 옆에서 아쉬운 소리를 덧붙일 수 있을 터였다. 보육원 시절을 생각하면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첫사랑이자 짝사랑이었던 봄이를 봐서라도, 불독의 취업을 강력하게 밀고 나가야 했다.
"조만간 장 대리를 통해서 연락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으면 되겠네."
"계장님, 감사합니다. 정말 쓸만한 놈입니다."
나는 계장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불독은 다시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차량 부서에서 나와, 본관 로비 휴게실로 갔다.
"백호, 네 덕분에 숨통이 트일 것 같아. 그리고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보육원 시절은 철없어서 못된 짓을 많이 했는데, 뒤늦게나마 사과한다. 정말 미안하다."
불독은 진심 어린 표정이었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눈곱만큼도 없어, 약하다 싶거나 만만하다고 생각되면 무조건 주먹을 휘두르던 그 불독이 맞나, 싶었다.
"봄이가 시켰냐?"
"뭐…, 대충 그렇지. 나와 살아주니까. 요즘 들어 식당 일을 무척 힘들어하거든. 너무 애쓰는 모습을 옆에서 보자니, 다시 길거리로 뛰쳐나가고 싶기도 했어. 실제로 한 번 나갔는데, 식당에서 일하다가 어떻게 알았는지 전화하더라고. 자기랑 그만 살고 싶냐고, 욕을 바가지로 하는 통에 집으로 돌아갔지.
"봄이가 중심을 잘 잡아주네."
"그렇다니까. 봄이가 없으면 나는 그저 길바닥 쓰레기일 뿐이지. 그리고 네가 있으니 팔자를 고친 거야."
"아직 채용 결정이 나지도 않았는데?"
"느낌이 좋아. 계장님도 사람 좋아 보이고."
"만일 채용된다면, 깡패짓할 때처럼 욱하는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멋대로 나대면 내가 곤란해진다는 것쯤은 알지?"
"올바르지 않은 일을 당해도 눈감고?"
"언제부터 정의의 용사가 됐는데?"
"봄이와 살면서부터."
"때로는 불의를 보고도 모른 척하는 게 용기야. 자신의 생존이 걸린 문제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