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대리가 사라지고 난 뒤에, 말들이 많았어. 저성과자여서 화성으로 쫓아냈다는 얘기도 있었고, 지저분한 사생활 때문에 내쳐졌다는 말들도 떠돌았다니까. 나야 전혀 믿지 않았지. 그런데 황은 재주도 좋아. 어떻게 기획팀에서 비서실로 승진할 수 있겠어? 아무튼 장 대리는 건강하게 보여. 그래, 부모님은 두 분 다 편안하시고?"
"그럼요. 아주 건강하십니다."
내가 지방 지사에서 기적적으로 본사로 올라왔다는 사실은 알음알음으로 웬만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어, 지방에서 부모가 살고 있다고 다들 짐작했다.
"계장님이 직접 세차하는 걸 보니, 여전히 일손이 부족한가 봐요?"
"요즘 사람들은 찐득하니 버티지 못해. 운전도 운전이지만, 윗사람 비위 맞추기가 어디 쉬운가? 출퇴근시켜주는 거야, 당연하지만, 지방 출장에 굳이 차를 쓰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잖아? 하루 종일 비위 맞추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기사 한 명, 추천해 드려요?"
"장 대리가 추천한다면 당연히 대환영이지. 그동안 도움 받았던 걸 생각하면, 무조건 합격이야."
"그럼, 며칠 내로 데리고 오겠습니다."
"역시 장 대리야. 이런 식으로 또 날 도와주네."
"그렇게 알고, 올라가 보겠습니다."
"퇴근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회포나 풀어보는 게 어때?"
"다시 올 때, 그때 한잔하죠."
"그려. 그렇게 하자고."
사무실로 올라가자, 박 주임과 황이 등을 보인 채 창가에 서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라를 빼앗긴 것처럼 잔뜩 인상 쓰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비밀스러운 얘기라도 되는 듯 목소리는 낮아, 들리지 않았다. 볼펜과 안경이 박 주임을 곁눈질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비서실에서 내려온 건 처음이에요. 별일이네요."
볼펜이 숨죽여 조심스럽게 목소리로 말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창가로 다가가, 황에게 아는 체를 하기도 마뜩잖았다. 볼펜을 비롯한 동료들의 눈치를 보는 것은 아니고, 박 주임과 황이 목소리 낮춰 은밀하게 대화하는 사이에 끼어들기가 왠지 내키지 않았다. 2년 전만 해도 후배이자 부하 직원이었지만, 지금은 기획팀 팀장과 비서실장이 아니던가. 그들에 비하면 내 처지는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자괴감을 느낄 만도 하지만, 솔직한 심정을 들여다보면 그럴 처지도 아니었다. 돌고 돌아 제 자리지만, 창고지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급기야 박 주임과 황의 주변에 아우라가 보이는 것도 같았다.
"다들 퇴근하지. 참, 장 대리님은 잠깐 남으시고."
얘기가 끝났는지, 박 주임이 이윽고 뒤돌아보며 말했다. 황과 눈길이 마주쳤다. 팀원들이 주섬주섬 일어났다. 뭐야? 무슨 일로 나만 남으라는 거야?
"내일 뵀겠습니다. 먼저 퇴근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남은 일은 집에서 끝내겠습니다."
팀원들이 도망치듯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가자, 어색한 침묵이 겹겹이 쌓였다. 나는 엉거주춤 뻘쭘하게 서서 박 주임과 황을 건너다보았다.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시말서를 쓸 일도 없었다. 팀원들이 없으니, 선배로서 무슨 일 때문이냐고 대뜸 따지듯이 묻고 싶었다. 그러나, 처지가 바뀐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하극상은 인사고과에 치명적인 약점으로 기록될 게 뻔했다.
"커피나 한잔씩 하면서 얘기하죠."
황이 탕비실로 갔다. 시비 걸거나 트집을 잡으려는 분위기는 아닌 듯한데, 대체 무슨 일이야? 서로의 처지가 뒤바뀌었으니, 현실을 인정하고 업무처리에서만큼은 상하관계를 확실히 하자는 다짐이라도 받으려고? 박 주임은 분명히 해두고 싶은 부분이겠지만, 직접적으로 마주치는 업무는 애당초 없는 황은 왜 이 자리에 있지? 나를 기획팀에서 밀어낼 때, 밀정 노릇을 함께 하던 배를 탔다는 동료 의식이 남아 있어, 박 주임에게 힘을 보태기 위해 함께 있나?
잠시 후에 황이 커피를 탄 컵을 들고 왔다. 입사해 기획팀에 처음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하지 않은 뜻밖의 행동이었다. 어리둥절했다. 대체 무슨 꿍꿍이야? 주변에서 얼쩡거리며 밀정 노릇 하던 버릇이 도졌나? 싸구려 친절을 베풀면서 경계심을 허물려는 수작인가?
황이 커피를 홀짝거렸다. 마음에 담고 있는 말을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화성에서 고생 많이 했죠?"
뜻밖에도 따뜻한 위로가 느껴지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뜬금없이 분위기가 왜 이래? 아까와는 딴판이잖아? 나라 잃은 심각한 표정과 비밀스러운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었다.
"손을 만졌더니 거칠었잖아요?"
황을 바라보았다. 창고에서 손을 잡았던 이유가 이거였어?
"변명이겠지만…."
박 주임은 머쓱해서 어눌하게 말했다.
"제가 몹쓸 짓을 했습니다. 장 대리님을 화성으로 쫓아낸 나쁜 놈입니다."
느닷없이 무슨 소리야? 닮은꼴 조 팀장이 아니었다고?
"베트남 투자 건에 대한 잘못된 자료를 장 대리님에게 줬습니다."
"제대로 된 자료는 내가 받았고요."
황이 끼어들었다.
"어쩔 수 없었어요. 조 팀장의 지시였으니까요."
박 주임은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꼴이었다. 그런데, 지금 왜, 굳이 털어놓는지 알 수 없었다. 이미 지난 일이니 묻어놓고 지나가도 내가 알 길이 없고, 설령 안다고 해도 부하 직원으로 곤두박질한 마당에 따지고 드는 것도 마땅찮은데, 왜? 지금, 이 시점에 털어놓는 거지?
그 당시에 베트남 보고서를 닮은꼴 조 팀장이 검토도 하지 않았다. 보지도 않을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한 이유가 궁금했다. 단순히 괴롭히기 위해서? 저성과자로 몰아붙이기 위한 증거를 수집하려고?
"팀장이 보고서를 읽지 않은 걸로 아는데?"
"저성과자로 낙인을 찍는데 필요한 물증이었어요. 아이디어는 내가 냈지만, 팀장이 밀어붙이라고 해서…."
박 주임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도 모르게 함정에 빠졌다는 거네? 그런데, 내가 기획팀으로 돌아왔다고 털어놓는 거야? 도대체 무엇 때문에?"
"매일 얼굴 보면서 지내야 하는데, 양심에 찔리니까요."
박 주임은 기다렸다는 물음이라는 듯이 재빠르게 말했다. 믿을 수 없었다. 멀쩡한 사람을 함정에 빠뜨릴 정도로 영악한데, 이제야 뒤늦게 양심에 찔린다고? 누굴 동네 바보형으로 아나. 아무리 착해도 참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벌컥, 화를 내면서 뺨따귀를 후려갈기고 싶지만, 황이 있어 비서실로 소문이 퍼질 게 뻔했다. 급기야 늙은이 회장의 귀에 들어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전히 저성과자라는 낙인이 채 지워지지 않은 터에, 가까스로 기획팀으로 복귀했는데, 그나마 제자리로 돌아온 행운을 날려버릴 수 없었다.
"그렇게 화를 낼 일은 아니에요."
황이 붉으락푸르락하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바로 위 직장 상사를 배신하고, 한 다리 건너에 있는 닮은꼴 조 팀장에게 온갖 비굴한 충성을 일삼아 창고지기로 유배 보낸 야비한 모략을 눈감아 두라고? 당한 만큼 되돌려주는 게 정의가 아닌가?
"기획팀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알고 보면 황 실장 덕이니까요."
박 주임이 말했다. 함정에 빠졌던 것처럼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느낌이 순식간에 밀려왔다.
"사실입니다. 총무팀장에게 강력하게 주장했어요. 구관이 명관이라고, 아무래도 기획팀에서 일했던 사람이 낫지 않겠냐고."
어쭈구리? 요것들 봐라? 한번 당하지, 두 번씩이나 당할 줄 알고? 뚫린 주둥이라고 또 수작질이야? 인사 명령은 늙은이 회장이 최종 결재하는데, 기껏해야 황의 힘으로? 어림 반 푼어치도 없었다. 물론 총무팀장이 인사서류를 적당히 조작하면 회장도 모를 터이지만.
"그래서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저성과자 함정에 빠뜨려 쫓아낼 때는 언젠고, 인제 와서는 복귀시켜 주었으니 감지덕지 하다고 넙죽 큰절이라도 하란 얘긴가? 도무지 앞뒤 맞지 않는 두 사람의 행태가 부쩍 의심스러웠다. 막말로, 지난 일이니 스스로 모른 척하고 넘어가면 나 역시 알 도리가 없는 내막인데, 긁어 부스럼을 일부러 만들지는 않을 터인데,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본부장님이 지켜보고 계십니다."
박 주임은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기껏해야 복도에서 스치듯 지나가며 본부장을 보긴 하지만, 딱히 나를 콕 집어 눈길을 마주친 적이 없어, 의외였다. 물론 나를 조 팀장으로 오해해서 말을 걸어온 적은 있지만.
"그게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 본부장님의 눈에 띄었다는 거죠. 아직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