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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는 자수성가했다. 19

by 이순직 Jul 27. 2023

"물건 빼시게요?"


눈치의 조언도 있었고, 스치기만 해서 굳이 옛 신분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혹시 본사에서…, 전략기획팀에서 근무하지 않았나요?"


잠바는 꼭 찍어 물었다.


"늘 빼던 물건이죠?"


"아닌가요? 파트장 말로는 기획팀 출신이라고 하던데?"


무시할 수도 없고, 빤히 알고 넘겨짚는데, 변명할 수도 없었다.


"오며 가며, 마주쳤겠지요."


"그렇죠? 역시 얼굴이 눈에 익는다더니. 앞으로 잘해봅시다."


잠바는 새삼스레 손을 내밀었다. 마지못해 악수했다.


"하루아침에 유배지로 떨어지니까, 기분이 어땠어요? 아직 본사에 연줄이 있어서 소문을 대충 들었죠. 배신당하는 거, 순식간이죠?"


잠바는 숨기고 자시고 할 건더기도 없다는 투였다. 쓰레기처럼 버려진 기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경험자의 허탈한 속내가 고스란히 묻어났다. 내 속을 긁어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말머리를 돌려야 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잠바 앞에서 게워내듯 속을 털어내고 싶지 않았다.


"그냥 가져가는 건 아닐 테고, 파트장과 나누나요?"


당연히 짐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심부름꾼이죠. 놀면 뭐 합니까?"


"그렇게까진 아닐 것 같은데요?"


"뒷구멍 장사라, 손에 쥐는 건 쥐꼬립니다. 그래도 월급쟁이보단 낫지만."


"꽤 짭짤하다는 거네요?"


"같은 배를 탔으니 하는 말인데, 파트장도 상납하는 눈칩디다. 무자료 거래라, 남는 게 꽤 있으니까, 굴러가겠죠."


잠바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복잡하게 얽혀있네? 하긴 돈이 되는 일이니 당연하겠지. 세상이 돈으로 돌아가는 것쯤은 지나가는 소도 알지 않나?


잠바는 트럭 가득 물건을 싣고 떠났다. 평소처럼 사무실로 돌아가 입출고 내역을 검수 담당 직원에게 넘기자, 파트장은 늘 그랬듯이 사무실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모두 직감적으로 파트장의 퇴근을 예감했다.


"장대리!"


파트장은 골똘한 표정으로 한참을 어기적대다가, 내 옆으로 와서 뜬금없이 빙그레 웃었다.


"나쁘지 않았지요?"


밑도 끝도 없이 내뱉고는 살짝 윙크까지 했다."


"뭐가요?"


"딱히 뭐가 아니라…, 나와 일하는 게…, 그럭저럭 괜찮지 않냐는…, 뭐 그런 얘기지."


파트장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뒤로 숨긴 채 대충 얼버무렸다. 넘겨짚는 건가? 아니면 떠보려는 수작인가? 잠바와 별일 없었다는 것은 사무실에 앉아서도 훤히 꿰뚫을 수 있을 텐데? 이제는 판을 뒤엎기는 이미 늦은 터였다.


"물건은 탈 없이 싣고 갔습니다. 그런데 왜?"


"그게 아니라…, 본사에서 흘러나오는 얘기가 있어서…."


"네?"


파트장에게 본사의 소식통이 있다는 얘기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왠지 뒤통수가 싸했다.


"나 좀 보지. 따라오게."


파트장은 사무실을 나갔다. 요사이 별다른 일도 없고, 그렇다고 파트장의 비리를 폭로할 마음조차 없었다. 본사에서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알 수 없으나, 설령 파트장의 허튼짓과 관계있다고 해도 나와 상관없는 없는 일이었다. 황에게조차 연락하지 않는 터라, 누구도 만난 적이 없었다.


"어서 가보세요."


눈치가 이미 눈치를 챘다는 투로 사무실 문을 향해 고갯짓했다. 완전히 없어지진 않았으나, 동료들이 외지인 취급하는 낌새는 여전히 느낄 수 있었다. 사무실에서 나만 모르고 있는 어떤 일이 있다는 거야? 당사자를 피해 가는 소문처럼 저희끼리 소곤소곤하다가 내게는 쉬쉬하는, 말하지 않는 어떤 얘기? 자주 있지는 않으나, 퇴근 전 파트장의 호출에 불러가, 된통 꾸지람을 당해 눈물 콧물 짜는 여직원도 있었으니, 은근히 걱정이 앞섰다.


"뭐, 들은 거라도 있어요?"


눈치를 빤히 쳐다보았다.


"가서, 들어보면 알 겁니다."


눈치는 다시금 고갯짓했다. 무슨 내용인지 이미 알고 있으나 말하지 않겠다는 눈치를 다그쳐봤자, 소용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입이 무겁다는 것을 알고 있는 터였다.


사무실을 나가자 파트장은 천천히 걸으며 창고를 점검하고 있었다.


"이 바닥이 원래 깨끗하지 않지. 알고 있습니까?"


파트장은 씨름선수 출신다운 우람한 몸집을 내게 똑바로 돌리며 위협하듯 말했다. 이 바닥이라니? 잠바의 말처럼 뒷구멍 장사를 하는 바닥? 살짝 미간을 찡그리는 파트장의 얼굴이 험상궂었다.


"배신자는 곱게 놔두지 않는다는 거."


난데없이 웬 협박? 그리고 배신자라니?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루 이틀 같이 지낸 사이도 아니고, 알아들었을 거라고 봅니다. 그렇죠?"


파트장의 말투가 다시 나긋나긋해졌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대체 뭐 하자는 짓이야? 떨떠름한 표정으로 파트장을 바라보았다. 파트장은 싱긋 웃었다.


"축하할 일은 아닌데, 암튼 축하합니다."


"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릴 늘어놓는 거야? 파트장은 밝게 웃었다. 근래에 보지 못한 웃음이었다.


"본사로 올라간다는 얘기가 돌아요. 예상보다 늦기는 하지만, 어쨌든 올라가게 됐으니 축하할 일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실을 어떻게? 더구나 인사철도 아닌 데요?"


막연히 기대는 했으나, 황으로부터 통 소식조차 없어 포기한 마당이었다. 닮은꼴 팀장에 대한 마음 안에 쌓인 분노가 조용히 이글거리던 참이었다. 그런데 본사로 복귀한다?


"처음도 아닙니다. 물론, 본사에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암튼 배신은 용서할 수 없어요."

   

파트장은 다짐이라도 받겠다는 듯이 <배신>에 힘주어 말했다. 말 한마디라도 어깃장을 놓으면 지금 당장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투여서, 한두 번 해본 솜씨는 아니었다. 눈치의 말에 따르면 내가 처음도 아니었으니, 전임자이던 잠바에게도 배신이니 어쩌니 하면서 단단히 단속했을 터였다.


"우리끼리만 알고 있는 작은 비밀이라고 생각해요. 참, 내일은 출근할 필요 없어요. 곧 발령장이 나올 테니, 내가 따로 연락하지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파트장은 선심이라도 쓰는 듯 호기롭게 말하고, 어깨를 툭툭 다독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복귀 소식도 뜻밖인데, 연락할 때까지 출근하지 말라고? 파트장의 차가 정문을 빠져나갈 때까지 제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앞뒤를 짚어보았다. 파트장의 정보력이 놀랍기도 하지만, 황이 아무런 귀띔도 하지 않은 것에 섭섭함이 밀려왔다. 마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듯이 창고에서 손까지 덥석 잡고 살갑게 굴더니, 여자 속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오늘이 마지막이네요. 다시 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축하합니다."


눈치였다.


"알고 있었죠?"


다른 동료들에 비해 비교적 가깝다고 여겼는데, 실망이었다. 행동이 이익과 아무리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상대의 신뢰를 헌신짝처럼 외면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냉정하게 다가왔다. 눈치가 그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다.


"전에도 얘기하지 않았나요? 전임자가 있었다고?"


눈치는 능글맞게 딴소리였다. 앞으로 얼굴 마주칠 일이 없으니 투덜거려봐야 입만 아플 뿐이었다.


"내일부터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던데, 전임자도 그랬나요?"


"그래요? 그건 말해주지 않은 사실인데. 아무래도 전략기획실 출신이니까, 편의를 봐주는 거겠죠. 복귀하면 앞으로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는 뜻이겠죠. 그럼, 지금이 마지막이네요.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눈치는 아쉬운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잘해준 것도 없는데, 무슨…."


"아닙니다. 사실은 우리 쪽으로 넘어오지 않을 것 같아서, 파트장은 물론이고 나도 전전긍긍했어요. 아무래도 기획실 출신이다 보니, 그럴 가능성을 두고 골머리를 앓았죠. 다 지나간 얘기긴 하지만."


"내가 들춰내지 않더라도 꼬리가 길어서 들통나지 않겠어요?"


"그게 참, 신기해요. 나라고 그런 추측을 하지 않았다면 머리가 모자라죠. 당연히 했죠. 그러니 신통방통할 수밖에 없죠. 내가 입사하기 전부터 있었던 일인데도요. 파트장이 수완이 좋은 건지, 운이 좋은 건지 알 수 없지만요. 암튼 불가사의에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본사 차원의 묵인이 있지 않을까? 단순히 파트장의 비리가 아니라 그 윗선이 있다면?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숨겨진 부분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왜 미처 하지 못했을까? 그래야 비리에 당당한 파트장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세상은 내가 짐작하는 것보다 더 깊고, 더욱 음습하며, 비열한 곳일지도 몰랐다. 탐욕의 이름으로.


"나야, 굿이나 보고, 떡이나 얻어먹으면 그만이지만요."


"그렇기도 하네요. 근데 전임 파트장은 지금 뭘 하죠? 혹시 아나요?"


"왜요? 갑자기? 본사로 올라간다니까, 마음이 변했어요? 그래도 이미 늦었어요. 발을 빼기 힘들 걸요."


"그럴 리가요. 그냥 궁금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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