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싱긋, 웃었다. 서로 알 만큼 알게 됐다는 친밀감이 풍겼다. 그것은 귀신 할아비가 와도 어쩔 수 없는 운명 공동체라는 확신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 엇비슷하게, 한 발이 아니라 두 발 모두 들여놨다고, 스스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서울로 돌아가는 막차 버스 안에서 어두운 차장 위로 보육원 원장의 얼굴이 나타나자, 사람은 돈으로만 살 수 있다는 생각을 변명처럼 주섬주섬 늘어놓았다. 창고지기로 추락하면서 대리 기사 노릇을 할 수 없어, 기부금 액수는 요지부동이었다. 내일쯤 보육원에 가볼까? 그다지 넉넉하지 않으나, 보육원을 나오던 날의 초심이 빛바래진 양심을 기부금으로 덮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지만.
*
길은 낯설었다. 10년이 훌쩍 지나, 원장에게 진 빚을 뒤늦게 조금이라도 갚는다는 생각에 걸음은 자꾸만 빨라졌다. 졸업식이 마지막이었다. 취업은 되지 않고 기숙사에서도 나온 터라, 원장을 만날 용기는 애당초 없었다.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백호야,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단다. 이제 사회로 나가니,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한다…. 원장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맴돌았다.
보육원이 가까워질수록 걸음은 조심스러워졌다. 골목 후미진 구석마다 천천히 꿈틀거리는 선명한 기억들이 자꾸만 발목을 잡았다. 우린 모두 버림받은 거야! 쓰레기처럼! 알기나 해? 그러니까, 깝죽거리지 마라. 잘난 척도 하지 말고. 불독은 단단히 뿔이 났다. 자신이 원장의 눈 밖에 났다는 걸 알고 난 뒤였다. 나에 대한 시기와 질투는 곧장 은밀한 폭력으로 이어졌다. 나는 고자질이 나를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떻게 오셨나요?"
새치가 드문드문 보이는 중년이었다. 위아래를 살펴보는 눈길이 남자답지 않게 섬세했다.
"원장님을 뵙고 싶어서 왔습니다."
"내가…, 원장인데, 무슨 일이죠?"
중년의 눈빛에서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받는 것에 익숙한 기대감이 동시에 출렁거렸다.
"내가 알던 원장님이…."
"그 작자 말씀이군요. 불행하게도 만날 수 없겠네요."
재빨리 말을 끊은 중년의 눈빛에서 출렁거리던 기대감이 사라졌다.
"왜요?"
의아했다.
"그 작자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혹시, 여기 출신인가?"
"네."
"아, 그렇구나. 재작년에 쫓겨났어. 어디에 있는지 수소문도 되지 않을 거야."
중년은 대뜸 반말이었다. 고아의 심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투였다. 세상 어디에도 지친 어깨조차 기댈 언덕이 없다는 사실을, 막말로 하룻밤에 감쪽같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찾는 이 하나 없는 현실을 꿰뚫고 있다는 자신감마저 얼핏 보였다. 심한 모멸감이 밀려왔다. 역겨움이 가래처럼 목구멍 안쪽에서 들끓었다.
"보육원에서 쫓겨나다뇨?"
초면에 반말이냐며 따지는 것도 마땅찮았다. 고아를 다루는 전문가라는 해괴한 자부심마저 표정에서 풍겼다.
"아직 소문을 듣지 못했구나. 뒷주머니 차서 쫓겨났어. 야반도주했지. 앞에서는 그렇게 고아들을 위하는 척하더니 뒤로는 제 잇속 차리기에 바빴지. 수법도 교묘했어. 한 놈만 콕 찍어서 그럴듯하게 포장한 다음 사랑하는 척, 시늉만 했던 거야. 이름도 기억나. 장백호라고, 제법 머리는 돌아가는 아인데, 순진하기 짝이 없던 모양인가 봐. 그놈을 앞세워서 여기저기 많이 받아 처먹었지. 꼭두각시인지도 모르고 이용만 당했으니, 사회생활은 제대로 할까, 싶네."
중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까지 했다. 끝내 혀를 끌끌 찼다. 귀가 의심스러웠다. 중년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겪어왔던 원장이 아니었다. 말투나 표정으로 봐서 지어낸 말은 아닌 듯했다.
"원장님이…, 그런 사람이었어요? 아무래도 뭔가 착오가 있는…."
"착오는 무슨! 보육원으로 들어오는 지원금 절반을 뒷주머니로 쓱싹 했어. 그 돈으로 아들 유학까지 보냈고. 세상에 보육원 원장이 무슨 판공비가 있어? 뒤로 그렇게 빼먹고도 판공비로 쓴 돈이 분기마다 몇천이야. 사람은 겪어보면 안다고 하지만, 옛말도 틀려. 그런데, 그 작자는 왜 찾아?"
난감했다. 뭐라 둘러댈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보살펴줘서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인사하러 왔으면, 번지수가 틀렸어. 너희들은 이용당한 거야. 앵벌이 당한 거지. 어린 나이에 불쌍하게도. 분명 너도 그중에 하나일 테고."
나도 모르게 중년의 눈길을 피하고 있었다. 중년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도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의심하자니 사실로 명명백백하게 밝혀진 모양이었다. 보육원을 내팽개치고 달아났다니, 그보다 확실한 증거가 또 있을까.
"혹시, 장백호를 알아?"
"같이 지냈으니…."
나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 작자가 백호를 찾고 있다고 경고해줘. 절대로 만나지 말라고. 애지중지 보살펴주었으니 대가를 바라고 찾는 모양인데, 순진해서 꼴딱 넘어가 있는 돈, 없는 돈 박박 긁어모아 받치지 말라고. 유학 보낸 아들 밑으로 들어가는 돈을 마련하려고 이리저리 날뛴다는 소문이야. 하다 하다 이제는 고아들 등쳐먹으려고 바쁘다는 거야. 옛정이 아무리 끊기 어렵다고 해도 단칼에 자르지 않으면 그림자처럼 평생 쫓아다닐 거야. 내내 고생하는 거지. 그런 작자를 왜 귀신이 잡아가지도 않는지 몰라. 독한 놈일수록 명이 길다더니만…."
기부금 모금을 위한 각종 행사에 왜 빠지지 않고 참석해야 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때는 보육원 대표로 나간다는 사실에 우쭐해지는 기분이었다. 보육원에서는 구경도 할 수 없는 뷔페 음식은 물론이고, 원생과 차원이 다른 멋지고 깔끔한 옷을 입었으니. 드물기는 하지만, 낯선 어른들에게서 받는 용돈도 짭짤했다. 어쩔 수 없이 불독에게 거의 모두 빼앗겨도, 용돈을 받을 때면 내가 정말 잘난 줄 알았다. 그런 기분은 보육원에서 절대로 느낄 수 없었다.
"장백호와 비슷한 시기에 있었다면 봄이도 알겠네?"
봄이…, 첫사랑 그녀…. 원장에 대한 배신감을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마음 한쪽이 빠르게 촉촉해졌다.
"며칠 전에 찾아왔더라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어. 살아온 곳을 마지막으로 둘러보고 싶다나…. 얼굴엔 수심이 가득하고. 어떻게 사냐고 물었더니, 이것저것 대충하면서 살았다고…. 딱 봐도 사는 형편이 어렵게 보였어. 어디 봄이만 그런가? 고아들은 사회로 나가면 다들 똑같지. 하루 세끼 먹기도 벅차고. 그런데 우물쭈물하면서 장백호 얘길 꺼내는 거야. 난들 아나? 연락처를 모른다고 하니, 마지막으로 꼭 보고 싶다고…. 찔끔찔끔 울더라. 계집애가 마음은 여려서…."
"연락처를 남겼나요?"
"왜? 백호에게 알려주려고?"
"보고 싶다고 했으니…."
"그래서, 연락처를 남기라고 하니까, 됐다고, 이젠 됐다고 하면서 그냥 가버리더라. 무슨 꿍꿍이인지 표정은 점점 굳어지면서. 억지로라도 연락처를 남기라고 할 걸 그랬나? 지금도 마음이 짠해. 내가 원장으로 오고 나서 처음으로 사회로 내보낸 아인데…, 예감이 좋지 않아. 혹시라도 잘못되면 내 탓일 것만 같고…. 그런데 무슨 일로 예전 원장을, 아니 그 작자를 찾는 거야?"
"그냥…, 근처를 지나가던 길에…, 갑자기 생각나서…."
"내가 얘기했지? 그 작자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말라고. 불알까지 탈탈 털릴 수 있어."
"아, 네. 그럼, 그만 가보겠습니다."
"혹시라도 백호와 연락이 닿거든 봄이 얘길 꼭 해!"
"알겠습니다."
보육원을 빠져나오면서,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워졌다. 원장의 민낯에 대한 실망감과 배신감은 둘째치고, 봄이 소식이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마지막으로, 살아왔던 곳들을 둘러본다고?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에 꽉꽉 들어찼다. 보육원을 떠나기 몇 달 전에 들었던 강 선배의 자살이 피부에 와닿았다. 일 년 남짓 사회에서 버티다가 혼자 감당하기에 벅찬 생존의 높은 벽을 넘지 못하고,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흉흉한 소식이었다. 내성적이고, 말수 적고, 순둥순둥하기 짝이 없던 강 선배였다. 있어도 한참 찾아야 보이는 강 선배였다. 봄이의 성격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어쩌면 나는 원장의 분장술에 한낱 마리오네트로 이용되면서, 도일이나 불독을 비롯한 다른 원생들에 대한 차별을 애써 눈감았던 것은 아닐까. 급기야 봄이까지. 대학을 가난하게 다니던 무렵, 보육원의 성공 사례로 여러 기부금 모금 행사에 갔을 때도 나는 끝내 봄이의 안부를 원장에게 묻지 않았다. 그때부터 마음속에서 봄이를 조금씩 밀어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