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그렇고, 불독은 어떻게 사는지, 알아? 재작년 이맘때쯤 자취방에 쳐들어와서 일주일 넘게 퍼질러 잠만 자더니, 온다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졌어."
"해코지하지 않았지?"
"숨겨둔 비상금을 탈탈 털어간 것 빼고."
"미안하다."
"불독이 한 짓인데 왜 미안하냐? 지금 생각해봐도 도대체 알 수 없어. 편의점에서부터 뒤쫓아왔던 걸로 추측하는데, 거기서 알바 하는지, 어떻게 알았을까? 우연히 알 수도 있지만."
"미안해."
"왜 자꾸 그런 말을 해? 혹시?"
"그래, 맞다. 시간이 썩어 문드러져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 걸, 요즘 새삼스레 느껴. 타고 난 바탕을 어떻게 하겠냐? 자기 딴에는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다가, 실수도 하고 그런 모양이야."
도일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입술을 굳게 앙다물고,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알고 있으나 차마 말할 수 없는 말들이 있다는 걸 단박에 눈치챘지만, 털어놓으라고 독촉할 수 없었다. 도일의 말처럼, 사람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길거리에서 격렬한 하루들을 살아가고 있을 게 뻔했다.
"너는 뭐 하면서 살아? 신수가 훤한 것 같은데?"
"이것저것. 돈 되는 거라면 뭐든."
"두리뭉실하게 말하면 내가 알아듣냐?"
"너처럼 월급쟁이는 아니고, 사람장사 해."
"뭐?"
화들짝 놀랐다. 어디 팔 게 없어서 사람을 팔아? 도일이가 이 정도로 변했다고? 악독해졌다고? 믿기지 않았다. 예전에는 심심찮게 들려왔지만, 이제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은 장기 매매나 인신매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믿을 놈 하나 없네.
"노예무역은 아니고 소개업이지. 보육원 나와서 원양어선을 탔어. 그 자식 꾐에 빠져서. 몇 해 타니까, 도저히 못 해 먹겠더라고. 그러다 동남아 쪽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업체에 들어갔다가, 독립했지. 내일도 인천공항에 가서 픽업해야 해."
섣부른 추측에 뻘쭘해졌다. 불독에 비하면 심성이 착한데, 아무리 세상이 험하다고 해도 장기 매매나 인신매매를 할 사람은 아니지. 시간이 숱하게 흘러도 내가 도일은 알지!
"그 자식이 누군데?"
"누구겠어? 복수할 놈이지."
도일은 오른쪽 눈을 씽긋 감았다가 떴다. 보육원 시절의 뜨거웠던 분노가 가슴속에서 서늘해졌다는 뜻이었다. 언젠가 반드시 복수할 거라는 차가운 분노로 바뀌었다.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리는 사냥꾼의 예리한 눈빛을 감추고 있었다. 사실로 받아들이기도, 농담으로 지나칠 수도 없어, 마음이 아팠다. 차라리 불독을 향한 분노였다면 공감대를 나누면서 잔소리라도 할 터인데, 자식을 버린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라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
황이 다녀간 지 보름이 훌쩍 지났다. 검수 담당 여직원의 컴퓨터를 확인하려 했으나, 비번이 걸려 있었다. 파트장의 컴퓨터는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내가 수기로 작성한 창고 입출고 내역을 동료의 컴퓨터와 비교하면 손쉽게 증거를 확보할 수 있는데, 길이 막혔다. 본사 검수팀에서 취합한 내용을 확인하면 간단할 터인데, 그게 또 쉽지 않았다. 영업 비밀이라 담당자나 직속 상사가 아니면 애당초 접근하기 어렵고, 전략기획팀에 속하지도 않아 어깨 너머로 알기도 어려웠다. 냄새는 분명히 나는데, 출처를 찾지 못하는 꼴이었다.
"퇴근 후에, 시간이 있나요?"
사무실에선 동료들의 눈치를 보느라, 좀처럼 말을 걸어오지 않던 눈치가 다가와 말했다. 파트장은 퇴근했는지 어쨌는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창고 여기저기를 뒷짐 지고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다가, 불시에 사무실로 들이닥칠 수도 있었다. 자신보다 먼저 퇴근한 직원을 찾아내 꼬투리 삼을 짓을 또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수시로 당한 터라, 동료들은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천인공노할 못된 짓임에도 누구 하나 불만을 드러내는 사람이 없었다.
"무슨 일로?"
의아했다. 사무실은 물론이고, 지난번 카페에서 얘기할 때도 눈에 보이지 않는 텃세를 경험한 터라, 당연했다. 한솥밥 먹는 동료로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눈치는 검수 담당의 컴퓨터 앞에서 얼쩡거리는 나를 서너 번 봤다. 아무리 자연스럽게 행동해도 눈치의 눈에는 더없이 수상했을 터였다. 내가 눈치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보다 눈치가 나에 대해 아는 것들이 훨씬 많을 거라는 추측은, 보는 눈이 더 많기 때문이었다. 막말로 사무실 동료 모두가 나를 눈여겨보는 것을 넘어, 감시하고 있다고 여겨도 틀리지 않았다. 그들만의 견고한 카르텔은 하루아침에 쌓은 것이 아니었다. 카르텔 안에서 어떤 이권이 횡횡하는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오늘이 그날입니다."
"네?"
"특별한 호출이요."
"그래요? 당연히 시간이 있죠."
구린 냄새를 뿜어내는 구멍은 찾아내지 못했지만, 파트장의 양심에 호소하는 방법도 있었다. 내가 쥐고 있는 패를 보여주는 담판이었다. 장부에 잡히지 않는 물건이 감쪽같이 사라진다는 단순한 정황증거여서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장담할 수 없지만.
"비서실에서 다녀간 뒤로 연락이 있었나요? 인사철이 아니어서 아직인가…."
눈치는 앞으로 벌어질 사건들을 빤히 꿰뚫고 있다는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전임자들의 궤적을 옆에서 생생하게 지켜보았으니 당연하겠지만, 깐족거리는 느낌이 밀려와 기분이 살짝 언짢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개천에서 용쓰는 재주가 있다고 해도 운명이라는 벗어날 수 없는 올가미가 있어, 비참한 끝장은 끝내 피할 수 없다는 식이었다. 살아보지 않은 시간도 먼저 살아본 사람들을 떠올려보면 그럴듯했다.
"어쩌면 고비일지도 몰라요. 지금 상황이."
듣기에 따라서 협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엊그제 버스터미널에서 시비조로 말을 걸어오던 건장한 청년들이 떠올랐다. 씨름선수를 방불케 하는 몸집이었다. 화성 토박이라는 그들은 길바닥에 침을 퉤퉤 뱉으면서,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로마에 오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지 않느냐? 한 주먹거리도 되지 않는 주제에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껄렁대냐? 무슨 꿍꿍이인지 모를 것 같으냐?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밤 강아지가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알지 않느냐….
분명 초면인데, 마치 알고 있는 사람을 대하듯 서슴없이 지껄였다. 야! 그만 가자. 이쯤 타일렀으니 알아챘겠지! 형씨! 또 볼지도 모르니 몸조심하쇼! 청년들이 어두운 거리로 사라져간 사이, 뜬금없이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어안이 벙벙했다. 사람을 잘못 봤겠거니, 스스로 다독여도 찜찜한 기분은 이내 가시지 않았다.
아무튼, 급여 통장을 꼼꼼하게 짚어보고, 의문점을 해결하지 못한 실수가 발목을 잡고 있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 발짝 정도 저들의 음흉한 계략에 이미 말려들었을 수도 모를 일이었다. 뒤늦게 억울하다고 항변해도 3자가 보기에 영락없이 변명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주제넘은 참견일지도 모르지만, 좋은 게 좋잖아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눈치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파트장을 만나기도 전에 분위기 잡는 모양이 한두 번 해본 솜씨는 아니었다. 차를 타고 가면서도 여전히 낯선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마음은 오랫동안 꾹꾹 눌러두었던 갈등에 휩싸였다. 스스로 착한 사마리아인이라며 애써 외면해왔던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나? 전략기획팀에서 창고지기로 추락한 것도 따지고 보면 집착에 가까운 현실 외면 탓은 아닐까?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만, 원리원칙만 좇으려는 고집 탓이 아닐까?
천사나 악마는 책 속에나 있지, 현실 어디에도 없었다. 닮은꼴 조 팀장에게 처음부터 잘 보이려 갖은 애를 썼다면 창고지기라는 나락으로 떨어졌을까? 과연 좌천당했을까? 비굴하더라도 손이 발이 되도록 알랑거렸다면 박 주임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았을까?
모두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외통수로 내 안에서 밀어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다가, 눈치의 예언처럼 창고지기마저 미끄러지면? 당장 내일이 막막하던 취준생 무렵의 헐벗은 생활이 떠올랐다. 세상으로 내동댕이쳐질 때, 원장 놈이 뭐라고 당부했는지 모르겠지만, 네가 지금처럼 살다가는 언젠가 내게 와서 빌어먹을 거다. 불독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비상금까지 탈탈 털어가기 전날 밤이었다.
"여러 말 필요 없고, 바로 묻지. 장백호 씨. 우리 편에 설 거요?"
파트장은 내가 쥐고 있는 히든카드 따위는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듯이 사뭇 협박조로 물었다. 거대한 몸집이 내 앞으로 천천히 다가오더니 뚫어져라, 나를 쏘아보았다. 젊을 때 씨름선수였다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위압감은 뜻밖으로 엄청났다.
"소문에 따르면 조 팀장 눈 밖에 나서 쫓겨났다던데, 억울하지도 않아요? 게다가 낙하산이란 말도 있던데."